토마스 무어 / 김영운 옮김
몸과 영혼
15세기 플로렌스에서 보는 인간의 몸은 1990년대의 뉴욕에서 보는 사람의 몸과는 전혀 달랐다. 현대인의 몸은 능률적인 기계라서 제대로 모양을 갖추고 있고 각 기관이 가능한 한 원활하게 그리고 오래도록 기능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부분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기계 대용품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처럼 몸을 기계처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플로렌스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몸은 영혼이 겉으로 분명히 나타난 것이다. 영혼이 없는 몸을 누구나 생각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 몸은 부자연스럽게 영혼과 분리된 것이었다. 그런 것을 정신분열증 비슷한 것으로 부를 수도 있는데, 생명도 의미도 없고 시도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영혼이 깃든 몸은 세계가 지닌 몸에서 생명을 얻는데, 그것은 피치노가 말한 것과 같다. 즉, “세계는 살아서 숨쉬는데, 우리는 세계의 영을 우리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우리가 세계의 몸에다 어떻게 하는가가 곧 우리 자신의 몸에다 하는 짓이 된다. 우리가 이 세계의 주인들이 아니라, 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혼을 지닌 것으로 우리 몸에 연결할 때, 우리는 몸의 아름다움과 시와 몸의 표현력에 주목하게 된다. 우리가 몸을 기계처럼 다루는 바로 그 버릇은 근육은 도르래처럼, 각 기관은 엔진처럼, 그리고 몸의 시는 지하로 가두어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몸을 도구로 경험하고 몸의 시는 다만 질병으로 보는 결과에 이른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아직도 상상적인 몸을 돌보는 몇 몇 제도가 남아있다. 예를 들자면, 패션은 몸에다 상당량의 환타지를 안겨준다. 하지만, 현대의 남성용 의상은 이전 시대에 유행했던 것에 비하면 색상이나 스타일의 다양성 면에서 아주 떨어진다. 화장품과 향수가 여성들에게는 손쉽게 이용될 수 있는 것이고 몸이 지닌 영혼을 닦는데 있어서 중요한 면이 될 수 있다.
운동도 환타지와 상상력을 강조하면서 하면 더욱 더 영혼이 가득하게 할 수 있다. 보통 우리는 운동을 하면, 어떤 것에서 시간을 얼마나 쓰느냐, 심장 박동수는 어떻게 목표를 세우느냐, 그리고 근육을 단련하기 위하여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피치노는 500년 전에 날마다 운동을 하는 데 대하여 좀 색다른 충고를 하였다. 즉, “할 수 있는 대로 기막힌 아로마가 있는 식물들 사이에서 걷고, 그런 속에서 날마다 상당한 시간을 보내시오.” 그가 강조한 것은 세계와 감각이었다. 이전 시대에는 심지어 심장이 걷기를 통하여 마사지를 받았다고 말을 해도, 운동하면, 그것은 세계를 경험하며, 그 속을 걸으며 그 냄새를 맡고 감각적으로 세계를 느끼는 것과 갈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걷기의 대가였던 뉴잉글랜드의 에머슨은 그의 수필 “대자연” 속에서 이런 글을 썼다. “들과 숲이 안겨주는 가장 큰 기쁨은 인간과 식물 사이에 신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나는 홀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몰라주는 존재가 아니가. 그들은 내게 고갯짓을 해주고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이런 식의 에머슨적인 운동 프로그램에 있어서는 영혼이 사람의 인격과 세계의 친화적인 몸 사이에 있는 친밀감을 감지하는 일에 깊이 관여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과 세계의 몸에 대한 관점을 꽉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좀 느슨하게 할 수만 있다면, 수많은 다른 가능성들이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근육뿐만 아니라 코와 귀와 피부도 운동을 시킬 수도 있다.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의 음악소리도 듣고, 교회 종소리, 멀리서 지나가는 기차소리, 귀뚜라미 그리고 자연 침묵 속는 올빼미가 있음을 기뻐한다.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위하여 바보처럼 미친 에 가득한 음악 또한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뜨거운 동정심이나 감상하는 마음으로 볼 줄 아는 눈을 훈련시킬 수도 있다. 영혼은 구체적인 일들에게 애착하는 것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영혼 가득한 몸 운동은 언제라도 우리를 이끌어 세계와 애정어린 관계를 지향하도록 해준다. 월덴 연못가에서 은둔 생활하던 상황에서 몸 운동을 한 헨리 소로는 글을 쓴다. : “나듯이 소리쳐 부엉 부엉 울게 하라. 이런 소리는 늪이나 황혼녘의 숲에 감탄스럽게 적합하다. 어디 그뿐인가. 밝은 대낮으로는 결코 묘사할 수 없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미개발의 광활한 자연이 있음을 암시해 준다.” 몸 운동을 근육 단련에만 초점을 맞춘다든지 체지방 때문에 망치지 않은 이상적인 몸매 때문에 동기가 시작된 것이라면 그것은 제대로 되지 않은 불완전한 것이다. 소로의 올빼미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에머슨의 밀밭에 파도치는 물결을 돌려줄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런 날씬한 몸은 뭣에다 소용이 있을 것인가? 영혼이 깃든 몸이라야 세계의 몸과 친교할 수 있고, 자신의 건강을 그 몸과의 친밀함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영혼 지향적인 요가는 수많은 자세와 호흡의 형식을 거쳐서 할 수는 있다. 그런 반면에 몸동작과 자세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기억과 감정과 이미지에 주목한다. 운동하는 영혼에게는 자연으로부터 얻는 이미지가 중요한데, 그것은 산책하는 사람의 문화가 중요하고, 자연으로부터 얻는 이미지가 또한 그런 만큼이나 중요하다. 흔히 요가는 초월에 대한 이상을 품고 수행된다. 우리는 몸을 다듬어서 우리 자신의 완전한 이미지와 짝을 이루게 하기를 원한다. 아니면 우리의 몸이나 마음이 정상이나 익숙했던 것을 넘어서는 힘을 갖기를 우리는 원한다. 요가 수행의 이면에는 순수에 대한 완전주의적인 환타지나 이미지가 깔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영혼적인 요가가 원하는 것은 의식과 몸 사이의 친밀이요, 우리의 몸과 세계의 몸, 우리 자신과 동료 인간들 사이의 친밀이다. 요가는 어떤 향상의 목표를 향하여 끌어갈 것을 이미지나 기억 같은 것을 경험하지 않고도 수행방법이 가져다주는 상상 속에 깊이 빠져든다.
우리는 몸을 그리기도 하고 사진도 찍는다. 또 몸으로 춤도 추고 장식할 때는 화장품, 보석, 의복, 의상, 문신, 반지, 시계 같은 것을 쓴다. 우리는 몸이 상상의 세계요, 뿐만 아니라 영혼의 에센스라는 것도 안다. 우리가 몸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비타민을 먹는다든가 운동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몸의 표현성을 어느 만큼 드러내주는 예술작품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상상이 되지 않는 몸은 질병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병이 났을 때 우리가 또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몸이 당하는 고통이 곧 몸이 고장난 것으로 봐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병원들은 일반적으로 병이 난 영혼을 다룰 수 있는 채비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일이 대단해야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요구하는 것은 비싼 기술이나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가 아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인데, 어떤 병원의 행정 책임자가 나에게 병원 운영의 개선책을 문의한 일이 있었다. 나는 몇 가지 간단한 일들을 권했다. 그들의 계획은 환자들로 하여금 날마다 그들 자신의 차트를 읽게 하고, 동시에 그들의 질병의 화학적 생물학적 측면을 서술하는 플렛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제안한 것은 체온이나 투약에 관한 차트를 주는 것보다 환자들이 입원 중의 인상이나 감정들을 추적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꿈을 날마다 노트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또한 권고한 것은 환자들이 그림도 그리고 조각도 하고 치료받는 동안의 환타지를 춤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방을 병원에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평상적인 의미로 말하는 예술치료실이 아니라 예술 스튜디오를 좀 더 생각한 것이었다. 내가 동시에 권고한 것이 있다. 즉,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환자들이 그들의 질병과 입원생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의료 기술적 포맷을 더욱 강화시킬 그런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스토리텔러 같은 이야기꾼이나 아니면 영혼이 말하게 하고 이미지를 찾게 하는 것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 정도면 족할 것이다. hospital(병원)은 hospis에서 온 말인데, 그 뜻은 ‘나그네’와 ‘주인’을 나타내는데, 덧붙여서 ‘주’ 또는 ‘강자’라는 뜻을 지닌 pito가 같이 있다. 병원은 나그네가 쉼과 보호와 돌봄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아마도 질병은 병원에 찾아오는 나그네요, 실제의 병원은 낯선 질병을 주인처럼 맞이하는 우리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유일한 형식이라 할 것이다. 라틴어로 hospis는 동시에 ‘적’을 의미하는데, 나는 질병 속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있는 이런 요소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질병은 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확신을 가지고 그런 신화를 살아냈다. 이제야말로 질병이 머물 곳과 돌봄을 받을 곳을 필요로 하는 나그네로 봐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사랑의 몸(Love’s Body)이라는 영혼 가득한 책 끄트머리에 가서 노만 O. 브라운은 말한다. “언제나 조용히 말하고 있는 것은 몸이다.” 우리 자신의 질병을 보살피는 호스피스로서, 그리고 우리의 몸을 돌보는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과제는 그런 몸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귀를 조율하는 일이다. 몸의 조용한 말을 듣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귀가 아니고, 실제적인 청진기나 CAT-스캔 같은 것은 명백히 아니다. 이런 귀의 기술은 일찍이 발명된 어떤 기구보다도 더 예민하고 감지력이 높은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귀다. 즉, 누구라도 세계를 상상력으로 보는 그런 사람의 귀다. 에머슨은 말하기를 오로지 시인만이 천문학과 화학과 그밖의 다른 과학의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시인은 과학을 싸인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을 사실들의 콜렉션 쯤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몸에다 영혼을 허용하고 보면, 몸은 무진장의 ‘싸인’의 근원이 된다. 모든 신체적 특성을 감안해서 몸을 돌보되 동시에 상상력을 더하면, 그것은 영혼을 돌보는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프로젝트는 사실을 중시하는 시대 속에 살면서 마법으로 불러일으키듯이 의학적 시를 불러내는 어려운 방법을 주창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의학도들에게 읽힐 책들 가운데서 파라셀소스나 피치노, 그리고 에머슨 같은 이들의 책이 목록 꼭대기에 놓일 날이 올 것인가? 언제나 의학도들이 예술 속에서 진지하게 자세히 몸을 연구하게 될 것인가? 의사를 찾아가서 면담하는 속에 환자의 운명적인 역사와 꿈과 질병에 대한 개인적인 환타지를 검토하는 일이 포함될 때는 언제쯤일까?
필경 그 날은 오고야 말 것이다. 이미 왔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기의 치료사 피치노는 류트를 갖추고 있으면서 자기 환자의 사회적 불안 장애를 예술로 연주하였다. 키츠는 의학에서 시로 커리어를 쉽게 바꾸었다. 에머슨은 철학자로서 질병의 미스테리를 탐구하였다. 삶에 대한 기술적 환타지가 현대 의식을 꽉 잡고 있던 장악력이 어느 부문에서는 느슨해지고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아마도 몸이 corpus 즉 시체와 동일시되는 것으로부터 해방될 찬스는 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몸 자체의 예술을 새롭게 감상함으로써 영혼의 흐름이 활성화될 때 몸이 그것을 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