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 (2002. 6)

영혼의 돌봄 (Care of the Soul) 45

토마스 무어 / 김영운 옮김


제 9 장 영혼의 경제학 : 일, 돈, 실패, 그리고 창의성

영혼을 잘 돌보기 위해서는 삶의 모든 국면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이 말은 본질적으로 평범한 일들을 가꾸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 영혼이 가꾸어지고 양육된다. 치료는 대체로 위기에 처한 경우나 만성적으로 괴롭히는 문제가 있을 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나는 정원 만드는 일에 대해서 의논하거나, 집을 짓거나 시의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치료받으러 와서는 영혼의 문제 를 검토한 경우를 한번도 본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일들은 영혼의 상태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영혼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영혼의 이슈들은 대체로 무의식적인 상태로 가꾸어지지 못한 채 남게 되고 따라서 대부분 문제점으로 남는다.

영혼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일상 중 가장 무의식적인 것은 업무와 업무 환경 즉 사무실, 공장, 상점, 작업실 또는 집이다. 여러 해 동안 실제 생활을 지켜본 결과, 업무(노동)조건이 적어도 결혼이나 가족만큼 영혼에 영향을 끼치 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담긴 심오한 이슈는 인식하지 못한 채, 문제에 대하여 반응하고 조절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확실히 말해서 우리는 기능과 능률에 지배당하며 따라서 영혼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함으로써 영혼의 불만에 맞닥뜨려진다. 우리는 일 -일의 스타일, 도구, 타이밍 그리고 환경의 시에 관한 고조된 의식을 갖게 될 때 심리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다.

여러 해 전 나는 ‘세계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중세의 아이디어에 관하여 강연을 한 일이 있다. 수도사들은 일종의 영적해독능력을 묘사하기위하여“세계의책”이라는 libermundi 는 표현을 썼다. 그 강연에 참석했던 한 가정 주부가 전화해서 이런 방식으로 읽고 싶다며 자기 집으로 와주기를 요청했다. 나는 그런 시도를 해 본 일은 없었지만, 치료를 하면서는 여러 해 동안 꿈과 그림들을 읽었던 터라 그 생각에 매력을 느꼈다. 우리는 함께 이 방 저 방을 걸으며 자세히 관찰하고 우리가 받은 인상에 대하여 조용히 토론을 하였다. 이렇게 ‘읽는 것’은 분석이나 해석이 아니라, 이것은 융의 표현으로서 “꿈을 계속해 나가며 꾸는 것”이란 말을 바꾸어서 “그 집을 계속해 나가며 꾸는 것”이라 하는 편이 옳았다. 내 아이디어는 그 집의 시와 알파벳을 보고, 그 집이 건축 양식과 색상과 가구와 장식 그리고 그 순간에 처해 있는 조건이 짓고 있는 제스처 같은 것을 이해하자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진정으로 자기 집에 헌신적이었으며, 가사 노동은 그녀의 삶 속에 존귀하게 자리매김되어 있었다.

우리에게 다가온 이미지 가운데 어떤 것은 인간적이었다. 나는 그전에 결혼 생활에 대하여, 자녀와 방문객들과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이야기들은 그 집의 건축에 대한 것과, 미국 역사와 관련이 있었고, 또 주거 생활과 집의 본질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를 터치하였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매끈한 타일과 고운 색상으로 꾸민 흠 없는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은 강렬한 이미지와 심리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방이었는데, 신체적인 폐물, 세제, 프라이버시, 화장품, 옷, 나체상, 지하로 연결되는 파이프, 수돗물 등으로 차 있었다. 수많은 꿈들에게는 좋은 환경이었고, 상상의 세계에 대해서는 특별히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표시가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 화장실은 비범하게 질서정연하고 깨끗하였으며, 그 집을 정직하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점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그래서 그 집의 여주인이 그 방 을 흠 없게 가꾸어 유지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 점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이 집을 읽으면서 나는 이 여성을 알아내려고 한 것도 아니고, 뭔가 잘못된 것을 찾아내려 한 것도 아니고, 그녀가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길을 찾아주려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집을 특별히 바라보면서 일상적인 평범한 삶 속에 숨은 영혼의 싸인들을 일별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집을 다 둘러본 우리 두 사람은 똑같이 그 장소와 거기에 놓인 사물들과 일반적으로 연결된 느낌을 받았다. 나로서는 내 자신의 집에 대하여 성찰하며 일상 생활의 시에 대하여 더욱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동기를 찾은 셈이다.

가정이란, 우리가 ‘바깥’ 일을 가지고 있든지 아니든지 간에, 일상적인 일의 자리다. 당신 자신의 집을 읽다보면, 어느 시점에선가 가사 도구 즉 진공 청소기, 빗자루, 걸레, 비누, 스펀지, 설거지통, 망치, 드라이버 같은 것들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아주 소박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집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근본적인 것이기도 하다. 볼티모어 출신의 천문학자이며 치료사인 진 롤은 가사를 ‘관상의 길’이라 일컫고, 만약 우리가 날마다 집안에서 해야 할 일, 즉 밥 짓는 일에서 세탁에 이르는 일들을 무시하면, 우리는 일차적인 세계에 대한 소속감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날마다 집안에서 하는 일과 우리의 자연환경에 대한 책임감 사이에는 또한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나는 그 말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즉, 집에는 여러 신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일은 우리가 삶을 지탱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집안의 영들을 인정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들에게는 빨랫솔이 성물이며, 우리가 이것을 조심스레 사용할 때, 우리는 뭔가를 영혼에게 바치는 것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은 치료의 한 형태가 된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방과 심장의 어떤 심실 사이에는 상응성이 있기 때문이다. 꿈 속에 나타나는 화장실은 우리 집안에 있는 방이며 동시에 영혼 속의 한 공간을 묘사하는 시적인 사물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삶의 소박한 사물들을 가지고 과장된 의미나 형식으로 팽창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하는 허드렛일을 찬찬히 하는 행위 속의 영혼에다 가치를 부여하고 세부적인 일에 눈을 돌리는 것을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어떤 수준에서 보면,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일은 우리의 성격뿐 아니라 삶 전체의 질에도 영향을 끼 친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평범한 가사 노동과 그런 일이 영혼에 주는 선물인 영혼충만함을 간과한다. 우리의 일상 노동을 남에게 시킨다든지 아니면, 스스로 하되 조심성 없이 하면, 우리는 뭔가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을 수도 있으며, 결과적으로 고통스러운 고독감이나 집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 등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그 여인의 집을 읽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 생활 속에서도 집을 ‘읽을’ 수 있다. 즉, 주변환경을 조사하고, 일에 쓰여지는 도구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시간이 어떻게 쓰여지는가를 고찰하고, 그 일을 할 때 느껴지는 기분과 정서 등에 주목한다. 일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즉, 무엇을 보며, 어디 앉아서 무엇을 가지고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능률을 올려줄 뿐 아니라 자신감이나 상상력에도 좋은 방향을 제시하는 효과를 얻게 한다. 어떤 사업들은 가짜 벽이나 플라스틱 식물이나 모조 예술품 같은 것으로 영혼이 없는 일의 개념을 덮어 버린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아름다움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일터에 갖다 붙이는 것이라면, 그거야말로 우리의 작업에 있어서 영혼 충만함을 잴 수 있는 측정치가 된다. 심각한 결과가 없기 전에는 영혼을 가짜로 대할 수가 없는 법이다. ‘낙원’이 라는 시에서 시인 앤드루 마벨은 “초록빛 그늘에 있는 초록빛 생각”을 언급한다. 플라스틱 고사리에 둘러 싸여 있으면, 우리는 플라스틱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작품으로서의 일

많은 종교 전승에서 보면, 일이 거룩한 (성전의) 경내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일이 ‘세속적’인(pro-fane: 성전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전 안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나 선불교의 수도사에게는 일이 기도, 명상, 예전(전례)만큼 세심하게 마련된 삶의 일부이다. 나는 이런 사실을 한 수도회의 수련사 시절에 배웠다. 수련사란 병아리 수도사라고 할 수 있다. 기도와 명상과 공부와 일 등의 영성 생활에 있어서 들고나는 모든 것을 배우는 단계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어느 날 사과나무를 전정할 때 있던 일이었다. 위스컨신에서 추운 겨울 날, 나는 사과나무에서 돋아난 잔가지들을 톱질해서 잘라내고 있었는데 잔가지들은 마치 사원의 뾰족탑처럼 사방에 돋아나 있었다. 나는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잠시 일손을 멈추고 쉬는 동안 스스로 물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기도와 명상과 라틴어와 그레고리안 성가를 배우고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의 손가락은 동상에 걸렸고, 나무 꼭대기에서 지독하게 불안한 상태에 있으며, 톱질을 잘못해서 여러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나는 알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해답은 일이 영성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수도원에서는 줄을 서서 일하러 가며 행진을 하는데, 후드가 달린 긴 수도복을 입고 침묵 가운데 걸어간다. 수도원의 작가들은 일을 거룩함에 이르는 길로 묘사한다. 제대로 된 종교는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심층적인 차원을 언제나 우리에게 암시해 주며 이 경우에는 현대 세계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일이 세속적인 일이 아니라는 사상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우리가 일을 할 때, 정신을 차리고 기술을 가지고 하든지 아니면 진짜 무의식적으로 하든지 간에 일은 영혼에 깊은 영향을 준다. 일은 상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영혼을 향하여 여러 수준에서 말을 한다. 예를 들면, 일은 특별한 의의를 지니는 회상이나 판타지를 불러내어 상상으로 나타나게 한다. 이런 것은 가족의 신화와 전통이나 이상과 연결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은 일 자체와 별 상관이 없는 이슈들을 추 려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일한다는 것은 알고 보면 여러 세대에 걸쳐서 가족들이 해왔던 것이거나 아니면 수많은 우연의 일치나 우연한 사건들을 거친 연후에 나타난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일은 소명이다. 의미와 정체성의 근원이 되는 곳으로부터의 소명이요, 그 뿌리는 인간의 의도와 해석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