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무어 / 김영운 옮김
어원학은 일상의 언어 속에 살아 있는 깊은 이미지와 신화를 조사하는 학문이지만 일에 대해 통찰할 수 있는 단서를 어느 정도 제공하기도 한다.
때때로 우리는 일을 ‘occupation(직업)’이라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말의 뜻이 ‘to be taken and seized(붙들리고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 단어가 성적 의미를 강렬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일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의 일이 우리를 선택했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현재의 ‘직업’을 갖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곧잘 운명에 대해 운운한다. 이런 이야기 속에는 어떻게 해서 자신의 일이 자신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들어 있다.
일은 소명이다. 우리가 그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일에게 사랑을 받는다. 일은 종종 애인이 그렇듯 우리를 흥분시키고, 위로하고, 성취감을 준다. 영적인 것과 에로틱한 것은 늘 함께 있다. 우리가 일을 하면서 에로틱한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십중팔구는 영적인 부분이 부족한 것이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의식 가운데 세례나 성만찬 같은 의식의 범주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붙이는 이름은 예전(전례)이다. 이 말은 헬라어 laos 와 ergos에서 왔는데, 합쳐서 번역하면 단순히 말해서 ‘보통 사람들의 일’ 또는 ‘평신도의 노동’이라 할 수 있다. 교회에서 행하는 의식은 일종의 일로서, 영혼의 일이다. 의식이란 일 속에서 영혼의 뭔가가 창조된다. 그렇다 해도 그 일을 ‘세상에서’ 행하는 일과 굳이 분리시킬 필요는 없다. 교회나 사원(사찰)에서 일어나는 일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표본이 된다. 교회는 세상적인 활동 속에 종종 숨겨져 있는 심오한 특성을 지적해 준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즉, 우리가 하는 일이 도로를 건설하든지, 사람의 머리를 깎든지 쓰레기 청소를 하든지 모든 일은 거룩한 일이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들을 (종교적으로) 의식한다면 우리는 거룩한 교회와 세속적인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일상적인 일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 위에 종교성이라는 옷을 입힐 필요는 없다. 의식이라는 형식은 어쨌든 일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의식적인 특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방법일 뿐이다. 따라서 자신이 돌보는 모든 물품에 경외심을 가진 성구 보관 책임자같이, 우리도 질적으로 만족스러운 도구 즉, 잘 만들었고, 보기도 좋고, 손에 딱 맞는 도구나 환경을 존중하는 청소기 같은 것을 사고 싶은 지도 모른다. 특별한 수예품으로 식탁을 꾸며 의식으로 삼고, 독특한 디자인과 질 좋은 목재로 만든 사무용 책상을 배치함으로써 일터를 깊은 상상력의 장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흔히 일터는 상상력의 공백 지대가 되어 일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먹여주지 못하고 오로지 세속적인 곳으로 전락하고 만다.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이 순전히 세속적이고 기능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목공이나 비서 업무, 그리고 정원 가꾸는 일 같은 평범한 일들조차도 기능적인 면 만큼 영혼과 연결되는 측면도 있다. 중세에는 이런 일들에게도 각각 농업의 신, 상인과 도둑의 신인 머큐리,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 등의 수호신이 있었다. 모든 경우, 영혼에 심오한 의의를 안겨주는 일들이 일상적인 일 속에서 만나지는 것을 나타내었다. 우리가 조상들로부터 배우는 것은 다름아니라 일상적인 직업 속에 포함된 익숙한 과제가 그 속에 집전하는 신이 있고, 그 신과 관련된 성례전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신화가 제공하는 암시가 있다. 그것은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형과 장난감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으로 잘 알려진 다이달로스는 그가 만든 장난감을 어린이가 가지고 놀면 그것들이 살아났다. 참으로 위대한 신 가운데 하나인 헤파스토스는 다른 신들을 위하여 가구와 보석을 만들었다. 어린이들은 장난감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가지고 놀면서 신화를 생생하게 살려낸다.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장난감을 만드는 이들을 다이달로스의 손길에 비유하면 매우 근사한 신화적 의미가 생길 법하다. 그들이 자신의 제품이 아이들 손으로 넘어갔을 때 생겨날 수 있는 마법적인 특성을 깊이 깨닫게 된다면, 거룩한 상상력으로 어린이들의 영혼을 돌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원리는 모든 전문직과 모든 형태의 노동에 부합된다.
우리가 일을 생각할 때, 우리는 기능만 고려한다. 그래서 영혼의 요소들은 운수에 맡겨 버린다. 삶에 대하여 예술성이 없으면, 영혼은 약화되고 만다. 내가 보기에 현대의 제조업의 문제는 능률의 부족이 아니라 영혼의 상실에 있다.
영혼을 이해하지 못한 회사들은 자신과는 다른 문화의 일을 바라보면서 그 방법을 모방하려 애쓴다.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방법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른 문화가 제조와 영업에서 성공하는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요구하는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두뇌만이 아니라 마음에 근거한 일이 되도록 느낌과 감각을 심층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무시한 채 표피적인 전략을 베끼는 것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일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융이 연금술을 이용해 작업한 것을 따르는 일이다. 연금술이란 원료를 용기에 넣은 뒤 열을 가하여 자세히 관찰하고, 좀 더 열을 가하고, 다양한 작용을 거치면서 다시 한번 관찰하는 그런 과정이다. 과정이 끝나면 금처럼 보이는 신비한 물질이 얻어진다. 그것은 현자들의 돌이거나 강력한 연금술약액이다. 융의 관점에서 보면, 연금술은 영혼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행해지는 영적 시술이다. 화공약품들과 열과 증류 과정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은 시적인 프로젝트로서, 그 속에서 실체와 색소와 다른 물질들이 숨겨진 영혼의 평행적인 과정에다 외부적인 이미지를 제공한 것이다. 천문학이 그 전체의 상징 체계를 모든 천체의 항성에 근거를 두는 것과 같이 연금술은 그 시적인 영감을 화공약품들과 그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찾았다.
천연 재료들 속에서 객관화된, 영혼의 물질들을 가지고 작업하는 과정을 두고 연금술사는 ‘opus-작품’이라 불렀다. 우리는 자신의 일상적인 일을 연금술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평상적인 일에 대한 평범한 관심은, 연금술사가 일컫듯 영혼의 일을 해내기 위한 ‘prima materia-원자재’이다. 우리는 인생의 사물들을 매개로 하여 영혼의 재료에 대하여 일을 한다. 이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지지한 고대의 관념이다. 평상적인 삶은 영적인 고등 활동 속으로 진입하는 수단이 된다. 아니면, 우리가 세상적인 일을 열심히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을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도 모른 채 영혼의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작품의 개념을 더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영혼 속에 나타나는 일상적인 일의 역할을 이해하게 될지 모른다.「심리학과 연금술」이라는 저서에서 융은 opus를 상상력의 작품이라 서술한다. 그는 현자들의 돌을 어떻게 생산하는지 방법을 서술한 고대의 연금술 교본에 대하여 논의했다. 같은 대목에서 그는 환상적이 아닌 진정한 상상력에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 대하여 논평하면서, 융은 말하기를 상상력은 “목표도 없고 근거도 없는 환타지를 빙빙 돌려서 신통치 않게 풀어내는 것이 아닌 사상이나 성찰의 본래적인 성취로서 이를테면, 단순히 대상물을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의 사실을 포착하고 그 본성에 충실한 이미지로 그것을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을 가리켜 ‘opus-작품’이라고 한다.
우리가 지적인 추상이나 감성의 더욱 심오한 뿌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 상상적인 환상보다 더 깊이 들어갈 때 우리는 영혼의 일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선다. 우리의 일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정체성과 운명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이미지에 상응하는 일을 깊이 있게 하면 할수록 영혼을 더욱 더 풍성히 지니게 될 것이다. 일이란 존재의 뿌리를 일깨우고 만족시키는 적절한 연금술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인다. 그 까닭은 먹고살기 위하여 많은 시간 일을 해야 하는 것뿐 아니라 일이 영혼의 opus-작품에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솜씨껏 가꾸고 있다(crafting). 이는 융의 술어로 말하자면, 개체화(individuating)하고 있는 것이다. 일은 작품에 대해서는 근원적이다. 왜냐하면, 온전한 관점에서 보면 인생은 영혼의 구성물(fabrication)이기 때문이다.
이를 더 소박하게 표현하자면, 직업과 작품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일이 우리 자신의 외연이나 성찰의 폭과 같다. 우리가 사업상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결말을 지으면 그만큼 기분이 좋아진다. 벚나무 재목으로 식탁을 만들고, 별 모양의 퀼트 작품으로 장식하고, 뒤로 물러나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자긍심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느낌들은 연금술적인 작품이 연출되고 있다는 힌트가 된다. 문제는 만약 우리가 행하거나 만든 것을 한 발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았을 때 우리의 기준에 못 미치고, 관심이나 집중력을 반영하지 못했다고 평가되면 우리의 영혼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나쁜 일을 하도록 허용한다면, 전 사회가 영혼에 대한 상처를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