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사건 23 (2000. 1)

사랑 때문이라고?

(창6:5-12, 막7:15-16)

하태영 (목사/삼일교회)

지난 11월 29일, 일간지마다 앞다투어 '옷로비 사건'에 관한 기사를 여러 면에 걸쳐 실었다. 그 중 한 신문은 3면 전체를 특집기사로 다루면서 오른쪽 상단에 [온갖 '통로' 찾다가 끝내 실패] [드 러난 박시언씨 로비행태]라는 타이틀 기사를 올렸다. 기사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필자는 중간쯤에 서 눈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신동아측이 개신교계 인사들을 내세워 김대통령 등에게 로비를 시도한 것은 좌절 끝에 꺼낸 마지막 카드였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나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교 계 지도자들을 동원해서 면회신청을 했지만 만나지도 않았다"는 김대통령 자신의 말을 인용하여 실었다. 이를 다시 확인해줄 요량으로 기사 끝에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의 논평을 첨가했다. "지 난 1월 중순쯤 몇몇 목사님들이 찾아와 최회장의 선처를 바란다는 탄원서를 놓고 갔으나 그후 최 회장은 구속되었다"고
옷로비 사건의 전말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옷로비 핵심 주인공인 최회장에게 "선처를 베풀어 달라"고 대통령까지도 "무시할 수 없는" "몇 몇 목사님들"의 '정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하려는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도움을 청하면 잘잘못을 떠나서 거절할 수 없 는 게 목사이다. 판단력 결여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사랑 때문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은 먼저 죄인을 향하시는 게 아니던가! 하지만 이로써 "선처"를 청원한 "목사님들"의 행태가 모두 설명되는 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있는 사회 의식의 미성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죄를 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이 지닌 속성 때문에 죄의 심판을 유보하지 않는다.
노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창세기는 대홍수의 서사를 이렇게 전개하고 있다. "야훼께서 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왜 사람을 만들었 던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창6:5/공동번역). 노아 시대 대홍수는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성서는 인류에게 닥친 재앙의 원인을 자연재해가 아닌 '인간의 죄악'에 두고 있다. 그 죄악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던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었음을 "한탄"하실 정도이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하 는 문제는 하나님의 "한탄"이다. 이 "한탄"을 '후회'로 읽거나 '분노'로 읽으면 큰 오류에 빠진다. 하나님의 창조행위 자체에 대한 한탄으로 읽어서도 안된다. 이것은 심판 받아야할 인간의 고통을 마음 아파하신 하나님의 심정이다. 그만큼 죄악에 젖어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애절함이 배어 있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은 성서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이왕 하나 님의 아픔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을 들어보자. "그는 실로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 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 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4-5).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하나님 자신의 아픔에서 연유한다. 이 "아픔"을 신학으로 형상화하여 [하 나님의 아픔의 신학]을 전개한 신학자(기타모리)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죄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아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랑 때문이다. 사랑하 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심판의 고통을 겪는 데 대해서 아파하신다. 물론 하나 님의 아픔은 창조 행위로까지 이어진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행위는 희랍 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근원자'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닌, 자기를 온전히 내어준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행위에 의한 것 이다. 사도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저희가 핑계치 못할 것"(롬1:20)이라고 하였다. "영원하 신 능력" 혹은 "신성"이란 다름 아닌 만물 가운데 스며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자신을 온전히 내주었기에 거짓없는 사랑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 에 속하라"(롬12:9)고 요청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노아를 보는 시각도 달리 해야 겠다. 노아를 가리켜 "의인" "완전한자" "하나님 과 동행한자"(창6:9)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어떤 신적인 영역에까지 이를 정도로 초능력을 지닌 신화적 인물로 여긴 대목이 아니다. 노아의 완전성은 그의 삶에 거짓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의 사랑에 일치하여 살기 위해 애쓴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노아는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이다. 남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시대가 거짓으로 가득하였음에도 거짓에 물들지 않고 진실을 받들어 살았다는 것이다. 창세기는 이런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간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왜 인류의 종말적 심판을 예시하는 대홍수 사건을 논하면서 지극히 미시적인 '거짓'을 중심 주 제로 세우는가! 과연 '거짓'을 인류심판의 중심 주제로 삼을 수 있는가? 우리는 이점에 대해서 좀 더 숙고해야겠다. 거짓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린다. 인류를 한 '가족'으로 삼 으시려는 그리스도 사건 자체를 무화시킨다. 생명 관계를 부정해 버리고 삶의 근원을 파괴시키는 뿌리가 거짓이다.
노아시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여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 다는 것은 당시 사회가 거짓이 '사회화'되었음을 적시하는 것으로 보고 싶다. 이는 거짓이 '정상' 을 짓밟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회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작은 거짓은 개개인을 파멸시키지만, 큰 거짓은 세상을 파멸시킨다. 아담과 이브의 거짓이 에덴의 질서 를 파괴시켰던 것처럼 이처럼 거짓은 파멸의 어머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4:25)
예수께서도 바리새인들은 옛 사람의 유전(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는 것이었지만, 실은 율법 핑 계로 마땅히 해야할 일조차 유기하기를 식은 죽 먹듯 하며 오히려 거짓의 척도로 참됨을 단죄하 는 저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런 바리새인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밖에서 들어가는 것 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막7:15-16)이 라고 하셨다. "안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거짓이다. 인간의 거짓이 창조세계를 파괴시키 고, 인간과 인간을 불신과 증오로 대립시킨다. 거짓은 거짓을 잉태하여 마침내 인간성을 파멸시키 고, 공동체를 분해시키며 창조세계에 재앙을 몰고 온다. 때문에 거짓을 버린다는 것은 단순한 미 덕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로 창조되는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거짓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니다. 새 천년 축제에 열을 올리고 있는 뒷마당엔 개개인의 거짓이 온통 사회적인 거짓으로까지 심화되어 '거짓의 사회화'를 형성하 고 있다. 시대의 지성과 양심이라는 사람들조차 거짓을 거짓으로 여기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 의 지식'이라는 최고의 지식을 설교하는 이들까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짓을 '옹호'하면서도 양 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자체가 모래 위에 서 있다는 증거가 아니 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거짓과는 공존하지 않는다. 거짓을 단죄하는 아픔(심판) 없는 사랑은 죄악에 동참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어느 부모가 자녀를 징벌하면서 아픔을 겪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에 대한 심판의 "아픔"을 수반한다. 하나님 자신이 아픔을 겪으시 는 것이다. 이 아픔에서 비로소 새로운 인간,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계, 아니, 새로운 교회가 열 릴 것이다.

19 물 한잔이 담긴 뜻은(마25:31-46)
20 베드로 콤플렉스-겸손의 사회학(눅14:11)
21 교인은 많은데 그리스도인은 없다?(눅12:1-12)
22 '시간의 역사'속에 담긴 기적을 탐구하라(행14:8-18, 롬11:33-36)
23 사람 때문이라고?(창6:5-12, 막7: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