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사건 27 (2000. 5)

제멋대로 폭발하는 생명에너지

(골2:1-3, 고전2:6-10)

하태영 (목사/삼일교회)

성령사건을 전개하면서 꼭 한 번 짚어보고 싶은 문제가 있다. 생명력과 이해력의 불균형 이라는 문제이다. 한국 교회는 성령을 폭발적인 생명 에너지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너 무나 강하다. 소위 '권능'(dunamis/힘, 권능, 세력, 기적, 방편, 병력)으로서의 성령만을 각인 시키고, 이해력의 원천인 성령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것이다.
골로새서를 보자.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서로 만나본 적 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 가를 말하는 대목 이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 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골2:2). 표준새번역은 밑줄 친 부분을 "풍부하고 완전한 이해력(sunesis/이해력, 통찰력, 마음, 비판적 지식)을 갖게 하 고" 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말씀은 뒤에 이어지는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골2:3)를 지시하지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이해력의 원천인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성령은 모든 것을 살피시니, 곧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 살피십니다"(고전2:10) 라고 말했을 것이다.
성령은 이해력의 원 천이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이해력의 원천인 성령에 대해서 기본적인 이해도 없는 것이 다.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소 긴 이야기를 도입해본다. 요즘 모 일간지에서 [당취(黨聚)](이재운 글)라는 소설이 연재되고 있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승려들의 구 국결사대 이야기인데, 거두절미하고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질풍노도처럼 보름도 안 돼서 서울까지 진격한다. 겁에 질린 조선 왕 선조는 허겁지겁 내빼기 바쁘다. 서울을 점령한 왜장들은 주인 없는 경복궁을 차고앉아 미쳐 도망치지 못한 궁녀들을 끼고 승전 축하연 을 벌인다. 저마다 조선 땅 고을 하나씩 나눠 가질 생각으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거나 하게 취기 오른 장수 하나가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고 괴이하다"면서 말을 잇는다. "왜 조선의 수령이나 백성들은 항복하는 놈이 한 놈도 없느냐"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 랬다. 동래부가 무너질 때도, 충주성이 무너질 때도 조선의 관리 군인 백성 할 것 없이 싸우다 죽거나 아니면 도망쳐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왜군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이었다. 저들은 성주가 패하면 그를 따르던 부하 장수와 백성들은 모두가 승자에게 무릎 꿇고 복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받아들인다. 젊은 여인들은 폭력을 쓰지 않아도 스스로 몸을 바친다. 그것이 승자에 대한 패자의 마땅한 예우이며, 또한 그것만이 패자가 살길임 을 터득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 백성들은 성주가 죽고 없는데도 항복하는 놈이 없으니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경복궁에서 붙잡힌 늙은 궁녀 하나를 눕히 려 해도 눈을 부릅뜨고 달려드니 그 일도 녹녹치가 않았던 것이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 자 흥겨웠던 연회장에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신문소설 이야기가 다소 길게 늘어진 것 같은데, 어쩌면 이것이 조선인 아니, 한국인의 기질을 짚어보는 단서가 되겠다싶어 주섬주섬 생각나는 대로 인용해본 것이다. 한국인은 생명력이 왕성한 민족이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버려져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 사람들 이다. 다윈의 진화론 시각으로 보면 한국인은 거친 자연 환경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토종 인종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라가 백성들을 책임지지 않고 돌보지 않는데도 제 스스 로 역경을 극복하는 민족으로 한국인만큼 강한 기질을 지니고 있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사실 조선의 역사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권력으로서의 국가는 존재했어도 국민의 생 명을 보호하는, 이를테면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는 존재했다고 보기 어렵다.
유카탄 반도 애니깽 농장에 노예로 팔려간 한국인들, 중앙 아시아 허허벌판에 버려진 조선인들, 남태 평양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끌려간 사람들, 동토의 땅 사할린 탄광 막장으로 끌려간 사람 들 모두가 정서적 은신처로서의 '조국'은 있었지만 자기 생명을 지켜주고 민족적 긍지를 갖게 하는 '국가'는 없는 상태에서 생존한 이들이다. 오늘의 해외동포 550만 대부분이 그 렇게 살아 남은 사람들이다. 그만큼 한국인은 생명력이 강한 민족이요 위기에 강한 민족 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역경에서 살아남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성공했으면서도 어느 정도 먹고 살만큼 되면 극심한 내부 혼란에 빠지거나 타민족의 공격 대상이 되어 또다시 위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혹자는 한국인의 '냄비근성'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문제의 본질은 더 깊은 데 있다고 본다. 바로 이해력 결핍이요, 이해하고 자 하는 노력의 결핍이다. 생명력은 넘치는 민족임에도 동료 인간을 이해하고, 주변 환경 을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이 원천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자동차로 치면 엔진 출력을 높이는 데는 애쓰면서도 제동장치와 조향장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이 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민족적 기질은 '토종'으로서는 좋을지 몰라도 '세계인'으로서는 부 적합한 종족일지도 모른다. IMF를 극복하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자. 장롱 속에 든 금붙이 까지 꺼내바치는 민족적 단결력과 애국심에 세계가 놀라지 않았던가. 하지만 형편이 조 금 나아지는가 싶더니 너-나 없이 제몫 찾기에 골몰하여 나라꼴이 또다시 위기로 몰리 고 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행동거지도 변함없는 반복이다. 이 또한 생명력과 이해력을 가늠해 보는 거울이다.

최근에 중국에서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에 의한 한국인 납치 폭행 살인 사건도 그렇다. 조선족 동포들이 왜 동족인 한국인만을 테러 대상으로 삼는 것일까? 어 느 한 쪽에 원인을 귀결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 일차적인 원인은 바로 조선족 동 포를 대하는 한국인에게 있다고 본다. 한국인은 도대체 타국에 뿌리 내리고 사는 동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 고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 지도 모른다. 존중할 줄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들 앞에서 제 멋 대로 무시하고 차별하고 호기를 부린다. 조선족 동포로서는 피가 거꾸로 서는 일일 것이 다.
이 같은 이해력 부족은 일본 동포에 대해서도, 러시아 동포에 대해서도, 국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동포라도 입장이 바뀌어 있으면, 이를테면 자기보다 잘 사는 나라 동포에 대해서는 맹목적으로 동경하면서 말이다.
한국교회가 성령을 폭발 적인 생명 에너지로만 고착시켜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이런 민족적인 기질과 너무나 딱 맞아떨어진다고 보면 틀린 생각일까? 무슨 일이든 앞 뒤 안 가리고 밀어 부치는 행동양 식 또한 기질적인 이해력 결핍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진보로서의 역사는 민족 구성원의 생명력 못지 않게 이해력이 충족되어야 한다. 생명 력이 아무리 강한 민족이라도 이해력이 결핍된 민족은 결코 역사의 진보를 선도하지 못 한다. 그들은 진보의 부스러기를 따먹을 뿐이다. 선진국의 꽁무니만을 따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만큼 선진국 문턱에까지 이른 것은 피나는 노력의 결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 만 우리 앞에 선진국이 없었다면, 그들의 진보의 낙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오늘의 우리 형편은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해력 없이 선진국 진입은 불가능하다. 아니, 이 해력 없이 항구적인 번영과 안정은 요원하다. 이해력 없이 진보의 그래프는 급상승과 급 퇴락을 반복한 뿐이다. 생명력은 급상승을 가능케 하지만, 이해력 결핍은 급상승이 급퇴 락의 원인이 된다.

한국교회는 이제 사물의 본질, 모든 문제의 본질, 삶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하는 성령에 눈떠야 한다. 그리하여 이웃을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환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낮아 짐'의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성령의 시각에서 이해력은 학력이나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경청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25 물 같은 성령(눅12:35-48)

26 고난으로 드리는 봉사(마20:17-28, 엡4:11-12)

27 제멋대로 폭발하는 생명에너지(골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