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32:9-18, 요16:16-24)
하태영 (목사/삼일교회)
각종 기치료(氣治療) 도구들의 범람과 함께 기(氣)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았던 적 이 있다. 인간의 생활 공간에는 기로 충만한데, 기의 흐름과 막힘에 의해 건강과 질 병이 결정된다고 한다. 기를 잘 활용하면 병이 낫는다고 한다. 건강한 사람은 더욱 건강해진다고 한다. 기의 흐름에 따라서 인간의 역사도 변한다고 한다. 성령을 기의 현상으로 말하는 신학자도 빠지지 않았다. 기철학, 기의학, 기운명학, 기역사학에 기 신학까지 등장한 것이다.
전기공학을 전공하는 서울대학교의 모 교수는 "지금 한반도에 기가 모이고 있다" 는 기풍수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이론을 들어보자. "21세기는 바야흐로 한국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한반도에 몰려오는 기는 앞으로 130년간 상승해서 21 세기를 주도하게 될 것이다." "한반도와는 달리 중국은 지금 기가 흩어지고 있으며 일본은 기가 꺾이고 있다."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리며, 전 직대통령이 구속되는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들은 한국에 모여든 기가 가마솥에서 끓 는 것과 같은, 세계 중심이 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모두가 기분 좋은 말이다. 그리고 나서 반년도 채 안돼 IMF를 맞이했다. 요즘 들 어서는 기 이야기가 쏘∼옥 들어갔다. 기 이야기가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현실이 불안정하고, 미래가 불확실할 때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희망적인 말을 듣고싶어 하고, 그럴듯한 이야기들이 유포된다. 미륵신앙 이야기도 그렇고, 정도령 이야기도 그렇다. 기철학이나 기풍수론은 특히 기계론적 운명론에 편승해서 어려운 시대마다 유포되는 단골 메뉴이다. 조선의 백성들은 아예 기풍수론이 인간의 운명과 사물의 성쇠(盛衰)를 결정짓는 필연처럼 믿고 지냈다. 최근에는 과학적 가설까지 덧붙여서 더욱 그럴듯하게 포장되어서 유포되기도 한다.
성서세계는 어떤가? 성서세계, 그 중에서도 예언자 세계로 들어가 보면 인간의 삶과 역사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나님의 영이 깃들어 있는 곳에는 풍요로움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지만, 하나님의 영이 떠난 곳에는 황폐와 절망과 굶주림밖에는 없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영은 한국인들이 기를 생각하는 것 처럼 자연의 순환 에너지와 같은 것이 아니다. 예언자에게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의 인격으로 이해된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깃들 수도 있고, 떠나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은 함께 하지 않는다.
이사야 32장 9-18절의 예를 보자. 앞에서는 나태와 무기력과 포만에 빠져 있은 여인들(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 행복에 취해있다. 일 할 필요도 없고, 배고플 걱정도 없다. 먹을 것은 항상 진수성찬이다. 입을 것도 풍 족하다. 마실 것도 차고 넘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기 도할 필요도 없다.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이 같은 상태가 얼마나 지속 될 것 같은가? "일년도 채 안 되어서 포도밭에 나가 보면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 다." "허리띠를 동여매고 포도를 수확하려 해도 거둘 포도가 없으며, 희락의 성읍에 는 형극의 찔레가 찌를 것이다. 그토록 번성하던 거리는 적막하여질 것이다." "궁궐 과 요충지들이 폐허가 되고 그 자리에는 양떼들이 풀을 뜯는 곳이 될 것이다." 물 질적으로 아무리 풍족하고 넉넉하게 살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떠난 곳은 결국 폐허 로 변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이다. 실제로 풍족하게 살다보면 정신적으로 해이해지 기 쉽다. 도덕적으로 무질서해지기 쉽다. 양심도 사라지고, 도덕도 사라지고, 정의도 사라지기 쉽다. 마침내 그들의 땅은 폐허로 변한다.
이어지는 이사야의 말을 더 들어보자. "그리고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거룩한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될 것이며, 공평과 화평함과 정의와 안전이 이뤄지리라"사32:15-18). 앞에서는 철저한 심판을 말하고, 뒤에서는 회복을 말하는 데 이 심판과 회복 사이에 본질적인 변화가 있다. 앞에서는 풍요롭 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떠난' 상태이고, 이어지는 회복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영 곧 성신이 '부어짐'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으로서 "성령"(ruach)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단 두 군데서만 말해진 다.(사63:10, 시51:11) 하나님의 영 곧 성령 없이 인간이 아무리 풍요를 가져오고, 문 화를 꽃피우고, 도시를 건설해도 결국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정 의가 없고, 공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또 평화와 안정이 있을 수 없 다. 공평이 없고, 정의가 없고, 평화가 없는 성령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통상 '메마른 땅' '메마른 심령'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상태를 말한다. 성령이 떠 난 상태를 말함이다. 영적으로 퇴락한 생활이 바로 '메마른 삶'이다. 우리는 사도행 전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린 사람들의 실증을 본다(행16:16-24). 그들은 고통받 는 인간을 도와줄 생각은 않고 오히려 노예로 부려먹는다.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 도 바울이 이 불행한 여인을 구하려고 했을 때 이들이 얼마나 집요하고, 간교하고, 폭력적으로 성령의 활동을 방해하고 있는가.
인간은 아무리 거친 자연환경이라도 성령이 함께 계시면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 는 땅이다. 인생살이가 고단하고, 정치 사회적인 난관에 봉착했다 해도 그곳에 성령 이 함께 하시면 희망이 소멸되지 않는다. 때문에 성령을 단순히 무인격적인 에너지 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동안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왜곡된 면이 많다.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 없이 단지 접신 상태와 같은 황홀경에만 열중한 성령운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해도 과언 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공평에 대한 인식도 없고, 정의에 대한 의식도 없다. 사회적 책임감도 희박하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평화는 남의 이야기다. 불의를 규탄하고 정의를 말하면 마치 성령이 없는 것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어쨌든' 소원성취 하면 된다. 성공하면 된다. 초콜릿처럼 달콤한 설교가 더 좋다. 이런 미숙한 성령운동이 오늘날 한국 교회를 유아기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아닌지? 한국 교회는 이 사야의 말씀처럼 성령의 인격적이며 사회적인 기능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해야 하겠 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성령의 임재를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 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시기 위해서 "떠나시는" 것이다. 특별히 선택 된 영적 엘리트에게만 부어주시는 성령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영 곧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해서 "떠나신"다. 이런 측면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자기 분 여(分與)이기도 하다. 그만큼 개개인에게 축복이며 동시에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요 구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들 삶에서 성령이 떠 나서는 안 된다. 영적으로 메마르면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것으로 인해 거죽만 남 는 인생으로 전락한다. 세상을 혼탁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된다. 좀 나아진 형편 믿 고 믿음의 열정이 해이해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영은 떠난다. 그들은 안일함과 풍요로움에 빠져서 영적으로 나태해진다. 결국은 정의도 사라지고, 양심도 사라지고, 죄악을 뿌리고 다니는 악귀들이 되고 만다. 물질의 넉넉함을 구하기 전에 성령 충만함을 구해야 한다. 우리들 삶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서는 안 된다.
25 물 같은 성령(눅12:35-48)
26 고난으로 드리는 봉사(마20:17-28, 엡4:11-12)
27 제멋대로 폭발하는 생명에너지(골2:1-3)
28 부활체험-<너> 안에서 죽은 <나>의 소생(눅24:13-35, 요15:6-11)
29 날마다 영으로 만나다(행13:26-33, 요21:1-14)
30 하나님의 영이 떠나지 않게 하라(사32:9-18, 요16:1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