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21:1-4, 사53:7)
하태영 (목사/삼일교회)
시인 서정주의 글 가운데 [신부]라는 산문이 있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린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
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
가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
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
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
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신부는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젊어서 요절한 여류시인 노천명은 [임 오시던 날]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애절한 가 락으로 노래하고 있다.
임이 오시던 날 /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 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 /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노래도 들어보자.
"내가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 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 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 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 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
앞의 두 글은 한국인, 특히 한국 여인의 구원에 대한 메타포가 담겨 있다면, 뒤의 계시록은 히브리인의 구원에 대한 메타포가 담겨 있다. 한국인의 구원은 매운 재가 되 어 폭삭 가라앉아 버리는 자기 소멸, 문을 닫고 죽죽 울어 버리는 자기 파혈(破血)로 표현된다. 이에 비하면 히브리인의 구원은 보다 적극적인 상황의 반전으로 나타난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도 없고,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없고, 모 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김 받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쪽이 더 적극적인 구원관을 지니고 있고, 어느 쪽이 소극적인 구원관 을 지니고 있다는 식으로 가치를 가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구원의 메타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는 것이 다를 뿐 본질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구 원의 결과는 다를지라도 그 과정은 빼 닮은꼴이다. 두 민족이 다같이 구원의 때를 조 용히 맞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양쪽 모두 기다림과 수용을 구원의 모티브로 삼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의 결과가 매운 재가되어 폭삭 꺼져 버렸든지, 아니면 그 눈에서 눈물을 씻김 받든지 하는 표현은 최후의 상황을 한 번 더 기술했느냐, 아니면 절제했 느냐 하는 차이일 뿐이다. 구원을 바라며 고달픈 상황을 맞이하는 기다림, 그 기다림 속에 하나님의 경륜과 인간사의 이치가 담겨 녹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력, 잡인들의 발길에 채는 들풀처럼 온갖 풍상과 모멸찬 세파에서도 좀처럼 꺾이지 않는 생명력을 만난다. 이 꺾이지 않는 생 명력이 신부는 신부이게 하고, 신랑은 신랑이게 한다.
물론 인간사에서 원상 회복이란 불가능하다.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는 흔적들이 망 각이라는 대뇌의 퇴화기능 때문에 원상회복이 가능한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기 는 하지만, 어제의 태양이 오늘 똑같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며, 어제 흐른 시냇물이 오 늘 또 그 자리를 흐르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인간사는 시간과 함께 소멸되기에 어렴풋 이 그 흔적을 기억할 수는 있어도 원상 회복은 아니 된다. 때문에 성미 급한 신랑의 오해를 참고 기다리던 신부가 마지막 그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매운 재가되어 폭삭 가라앉아 버리는 편이 훨씬 더 인간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의 상황 반전은 허구인가? 물론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황의 반전은 고달프게 살아온 날들, 눈물과 탄식으로 살아온 날들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는 바램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으로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기 때 문에 신부의 소멸과 함께 신랑 역시 소멸되는 것이며, 눈물 흘린 자의 소멸과 함께 눈물 흘리게 한 자도 소멸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생명 그 자체요,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기다림이요, 그 생 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사의 전면에 나타난다. 이 상태를 요한복음은 "태초 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 라"(요1:1)고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생명 그 자체로, 만물의 근원으로 나 타나게 되는 상태를 구원으로 볼 수는 없을까? 경망스러운 인간들의 예단처럼, 누구 는 옳았고 누구는 글렀고, 누구는 성공했고 누구는 실패했고, 누구는 구원받았고 누구 는 심판 받았다는 식의 판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체로 나타나시고, 생명 의 근원으로 나타나는 장엄한 우주적 사건이 구원이라는 말이다.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법석을 피우기보다는 이 하나님을 기다리며 받아들이는 자세 가 절실하다. 알고 보면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세상을 판단 하고 이웃을 난도질한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받아들이는 자세는 결코 소극적인 자세 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사 모두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용해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사, 상처투성이로 살아가는 인간사 모두를 내가 풀어 보 겠다고 덤벙거리지 않음이 더 믿음직스럽지 않은가?
2000년 기우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님께서 풀어 주실 때를 기다릴 일이다. 말 씀 앞에 다소곳이 앉을 일이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 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한"(사53:7) 그분처럼.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 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신다"(롬8:26b) 하지 않았던가!
25 물 같은 성령(눅12:35-48)
26 고난으로 드리는 봉사(마20:17-28, 엡4:11-12)
27 제멋대로 폭발하는 생명에너지(골2:1-3)
28 부활체험-<너> 안에서 죽은 <나>의 소생(눅24:13-35, 요15:6-11)
29 날마다 영으로 만나다(행13:26-33, 요21:1-14)
30 하나님의 영이 떠나지 않게 하라(사32:9-18, 요16:16-24)
31 진리 안으로 들어가라(욥28:12-28 요8:32, 행17:16-34)
32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다(마8:9-13, 엡2:1-11)
33 솔로몬이 그립다.(왕상3:3-15, 롬12:1-2)
34 말씀 앞에 다소곳이(계21:1-4, 사5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