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규 연재동화

강정규 연재동화 (2000. 5)

아버지의 향기

"아가, 정신 차려라, 아가!"
할머니가 냉수 대접을 내 입에 대주셨다. 아침이었다. 어느새 마당가에선 오동나무 잎새의 그늘 이 마루 끝에 일렁이고 있었다.
"인규야!"
경호가 찾아와 불렀다.
"응!"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재밌었어? 욕장에 사람 많지?"
경호가 마루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응? 응."
나는 마루로 나서며 비틀거렸다. 어머니가 내 속옷과 교복을 빨랫줄에 널고 계셨다. 진땀에 젖 고 소금물에 젖고 지린 똥이 묻은 것을 빠신 모양이었다.
"애비는 어디갔지야?"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물으셨다.
"아랫마을에서 복날이라구 개를 잡나봐요."
어머니가 대꾸하셨다. 마당가 오동나무에서는 매미가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시계 조!"
경호가 말했다.
". . . . . . . ."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어머니는 바지랑대를 곧추세워 빨랫줄 을 높이고, 할머니는 벽장에서 베개를 꺼내 베고 막 눕는 참이었다.
"아이스케키!"
아랫마을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아이스케키, 어름과자!"
"달고 시원한 아이스케키!"
"우리 어름과자 사 먹자!"
나는 책상 서랍에서 어제 쓰고 남은 돈을 찾아들고 신발을 찾았다.
"인규야, 시계 조!"
경호가 다시 말했다.
"어서 와"
나는 경호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안마당을 빠져 나와 언덕길을 내달렸다. 경호가 뒤따라 달렸다.
"인규야, 시계 조오!"
"빨리 와, 자전거 타고 가나 봐!"
"아이스케키, 어름과자!"
"달고 시원한 아이스케키!"
매미는 감나무에서 울고, 앵두나무에서도 울었다.

(9)

"어머님, 인규가 경호 시계를 잃어 버렸대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두 그렇지, 그렇게 애를 패느냐? 팬다구 시계가 나오냐구. . . . . . "
할머니는 내 등을 쓰다듬고 계셨다. 나는 할머니 무릎에 엎드려 흑흑 흐느꼈다. 고무신짝으로 얻어맞은 등짝이 얼얼했다. 어머니는 내 일기장을 보셨던 모양이다. 나는 무슨 일이든 그 날 일 기장에 기록해왔다. 초등학교 5 학년때 부터였다. 일기는 매일 쓰는 것이고, 숨김없이 쓰는 것 이다. 선생님께 배운대로 나는 그대로 해왔다. 어머니도 그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아이구 이를 어쪄, 아프자 아가?"
". . . . . . . "
"어제 밤새 앓고 난 것을, 겁이 나서 말도 못허구 끙끙 앓다가 병이 난 것을 이렇게 모지락스 럽게 때려? 제 새끼라두 어른 앞에서는 함부로 못 때리는 법여, 시에미 앞에서 워떻게 제 새끼라 구. . . . . . . , 이 녀석은 네 새끼만 아니구 내 손주란 말여!"
할머니가 내 등을 어루만지며 우셨다.
"어머님 잘못했어유. . . . . . . , 그렇지만 워떻게 남의 귀한 시계를 빌려 찰 생각을 한 대유. 머 리에 피두 안 마른 것이 . . . . . . . "
어머니가 할머니 앞에서 무릎을 끓었다.
"그려두 그렇지, 고무신 짝으루다 이렇게 . . . . . . ."
할머니는 계속해서 내 등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나는 속이 편했다. 어머니가 고무신 코를 손 가락에 꿰들고 내 몸을 닥치는 대로 때릴 때부터 뱃속은 편해지기 시작했다. 내 입으로 말은 못 하고, 답답했던 속이 풀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일기를 보고, 그래서 결국 알아야 할 것을 알고 홧김에 나를 때리다가 할머님께 꾸중을 듣고 계셨다. 결국 내가 해결 못할 일을 어머니와 할머님께 떠넘긴 셈이었다. 나는 마음이 편해지고 어쩌다 보니 까무룩 졸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