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규 연재동화 (2001. 12)

약수터 가는 길(2)



"저기 다람쥐가 또 있어."
경일이가 비탈길을 오르다가 발길을 멈추었다.
"그래, 어서 와. 나도 봤다."
아빠가 대꾸했다.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이름모를 산새들이 재잘거리고, 나뭇잎에 매달린 이슬 방울이 반짝인다. 산꼭대기에서 '야호'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보니지는 않았다. 염불 소리도 멀어졌다. 산마루에 올라섰다. 비림이 시원하다. 심호흡을 했다. 몸이 가벼워지는 듯하다.
"야"하고 소리를 지르자. "야"하고 메아리가 들려왔다. 산마루를 잇는 길은 평탄하다. 운동화 바닥에 밟히는 오솔길 바닥이 폭신폭신하다. 나뭇잎에 쌓여서 썩고 있다. 나뭇잎 썩는 냄새가 싫지 않다. 천군사 뒷간 냄새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한다. 얼마동안 걸었을까. 눈앞이 확 트였다. 그리고 내리막길이다. 멀리 시가지가 내려다보였다. 천왕산 산허리를 타고 넘은 셈이다. 나무 밑에는 특별시 사람들이 모여드는 약수터, 그 옆에 운동장도 있다. 나무 밑에는 나무 의자도 있다. 아니다. 나무 의자가 아니다. 나무 의자같지만 시멘트로 만든 의지다. 차가운 돌이다. 거기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아빠는 신문을 펼쳐들었다.
"우리 딸은 은행에 다닌다우."
옆에 앉은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딸은 시청에 다닌다우."
그 옆에 붙어 앉은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딸은 어찌나 옷을 고급스럽게 입는지 모른다우. 지하 상가에서 싸구려를 사는 것이 아니라 꼭 백화점에서 사지 뭐유. 그래서 우리 집에 백화점 봉투가 많다우."
"용돈 두 많이 드리겠구려…. 우리 딸은 자가용 살 거라우…."
"은행에 다니는 딸이 자가용을 사유?"
"아니, 시집간 큰딸이.. 그러니까 맏사위네 말이지유."
"용돈을 얼마씩이나 받우?"
"딸네 집에 돌아다니며 매달 받는다우. 쓰고 남아서 딸네 은행에 부금을 넣는다우"
경일이는 아무래도 이 할머니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래서 곧 탄로가 날까봐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다른데 정신을 팔려고 애썼다. 운동장에서 사람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 맨손체조를 하는 사람, 줄넘기를 하는 사람, 땅에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하는 사람, 괜히 허공을 치며 권투하는 시늉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외로와서 저러는거야."
아빠가 언젠가 이 곳에서 만난 아빠의 친구에게 하던 말이다.
"그래,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거야..."
그 때 아빠 친구가 대답했었다. 이 두 할머니들도 차라리 잠자코 계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또 시작이다.
"우리 큰 며느리는 대학원에 다닌다우."
"아들이 높은 자리에 있나 보우?"
"그럼유…."
더 있다가는 안되겠다 싶었다.
"아빠, 그만 가."
"그래, 가자."
아빠가 일어섰다.
"일찍 다녀가는군, 장교수…."
아빠의 친구가 그 건장한 체구로 앞을 막아섰다.
"아, 김국장 이제 오나?"
아빠가 친구의 손을 잡았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경일이가 인사를 했다.
친구분의 등 뒤에 붙어있던 소녀도 아빠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인사하지, 우리 막내 딸 민영이…."
아빠 친구가 말했다.
"안녕, 나 장경일이야."
"안녕, 나 김민영이야."
"천천히 오게."
아빠가 말했다.
"먼저 가게."
민영이 아빠가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서 경일이는 아빠의 손을 잡았다.
"기분이 어떠냐?"
아빠가 물었다.
"응, 좋아. 아주…."
경일이는 매일 새벽 아빠를 좇아 등산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산 언덕을 끼고 돌며 내려오는 길은 경사도 완만하고 제법 넓다. 등산객이 많이 오르내리는 길이다. 물통을 배안에 넣어 지고 걷는 사람,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는 사람,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걷는 노인 부부, 라디오의 리시버를 귀에 꽂고 혼자 장단 맞추며 걷는 사람, 젊은 남자와 여자가 허리를 꽉 끼고 불편하게 걷는 모양도 보였다. 어떤 사람은 비닐봉지에 나무 이파리가 떨어져 썩은 흙을 가득 담아 가기도 했다. 자기집 화단에 뿌릴 모양이다.
"아빠, 개 사 줘."
경일이가 불쑥 한마디했다. 강아지 두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 녀석, 보는 것마다…."
아빠가 웃으셨다.
"움직이는 게 갖고 싶단 말야…."
"텐트도 움직이니?"
"텐트 취소할께. 개 사 줘."
"아파트에선 안된댔잖아."
"아빠, 우리 이사가자."
"아빠가 책을 내서 많이 팔리면…."
"맨날 같은 소리."
신작로까지 내려왔을 때, 벌써 만원버스들이 자주 지나갔다.
"찬물 끼얹지 않을래?"
아빠가 목욕탕으로 들어가시며 말했다.
그 때 엄마가 하얀 봉투를 내놓았던 것이다.
"경일아, 네게 온 편지야….
봉투에는 '장경일 귀하'라고 씌어 있었다.
"…현관을 쓸고 들어오다 보니 편지함에 꽂혀 있더구나."

별나라에서 온 편지
경일아, 안녕.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붓글씨였다. 창호지에 쓴 붓글씨였다. 군데군데 먹물이 붙어 있었다.) …나는 '해 뜨는 별나라'에 살아. 오늘도 아빠와 함께 새벽 산책을 다녀왔지? 나는 알아. 네가 금년 열두 살,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이라는 것을. 친구가 되고 싶어. 너하고 말이야. 나도 금년 열두 살이거든. 너처럼 공부도 잘하는 편이야, 글씨가 서툴지? 이해해 줘. 먹을 갈아서 붓에 묻혀 창호지에 쓰는 글씨는 아무리 잘 쓰려고 해도 맘대로 되지 않거든. 너도 경험이 있어 알 수 있을거야. 연필이나 볼펜으로 쓰는 글씨는 맘대로 잘 돼. 그렇지만 우리 해뜨는 별나라에선 붓으로 글씨를 써. 더구나 자기 생각이나 마음을 써 보내는 편지는 꼭 붓으로 써야 돼. 그래야 정성이 깃들거든.
경일아
한 장의 편지를 쓰기 위해 어떠한 과정을 거치는 줄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