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규 연재동화 (2002. 6)

약수터 가는 길(8)



경일아.
종이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쓰는 종이라는 것이 식물의 섬유질을 뽑아 물에 풀어서 평평하면서 얇게 서로 엉기도록 한 다음 물을 빼서 말린 것인데, 그 과정도 노력과 정성이 필요해.
한지의 경우, 닥나무 줄기를 가을철에 잘라 다발로 묶어서 솥에 찐 다음 그 껍질을 벗겨 말리지. 이것을 검은 껍질이라는 뜻으로 흑피라고 불러. 이것을 다시 물에 담갔다가 겉껍질을 벗겨내면 하얀 속껍질만 남지. 이것을 백피라고 불러, 이 백피를 절구에 넣고 빻거나 널따란 돌판에 놓고 방망이로 두들겨서 잘게 펴는거야. 이것을 물에 넣고 닥풀이라는 식물성 끈끈이를 섞은 다음, 우리가 맛있게 먹는 김을 만들 때처럼 발로 건져서 말리는데, 이때 먹물을 조금 흘리면 무늬종이도 만들 수 있는거야.
경일아,
다시 의자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

“아, 춥다.”
나무의자가 말했어.
“저 별 좀 봐, 떨고 있네.”
철제의자가 말했어.
“곧 겨울이 올 테니까.”
초록색 의자가 말했어.
“우리집 응접실은 따뜻할텐데…”
안락의자가 말했어.

내 귀에는 이 의자들의 이야기가 왠지 노인들의 이야기처럼 들려.
노인들이 살아 온 세상은 지금과 달랐다는 것을 나는 알아. 그들은 참으로 사랑하며 살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 나는 그것을 우리 별나라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읽을 수 있어.
어떻게 이야기해야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할 수 있을까 … 그래,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별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쉽게 내버리지 않아. 네가 사는 별나라 사람들같이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사고, 슈퍼마켓에서 라면을 사고, 복덕방에서 집을 고르지 않아. 필요하면 사고, 진력이 나면 팔아버리고, 헌 것을 버리고 새 것을 함부로 취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지.
우리 고모를 며느리로 맞을 집의 할머니가 어떻게 우리집을 찾아왔는지 알아? 계란장수 차림새였어. 우스워라, 대바구니에 계란 몇 개를 넣어 가지구 우리집에 찾아왔을 때, 고모는 단장하고 새 옷을 입고 기다렸던 게 아니야. 똥통을 지고, 맨 발로 마당을 지나다가 계란장수 할머니를 만났던거야.
“큰애기가 힘도 좋네. 나 물 한 바가지만 주겠수? ”

“마루에 좀 앉아 기세유, 금방 떠다 드릴께유.”
이게 훗날 시할머니와 손주며느리가 첫선 보며 주고받은 말이야.
“큰애기는 예배당에 댕기남? ”
마루 끝에 놓여 있는 성경책을 보고 계란장수 할머니가 물었어.
“그래유, 예배당에 댕겨유.”
“나는 절에 댕기는디, 예수님 자랑 좀 혀봐.”
“성경에는 웬수두 사랑하라구 써 있어유. 부처님두 웬수까지 사랑하라구 가르치남유 ? ”
“워디가 … 우리 헌티야 애시당초 워디 웬수라능 게 있어야지, 호호호….”
아욱국 끓이고 상치, 쑥갓 뜯어다 뜨거운 점심밥 지어 드려 잡숫게 하고, 상머리에 앉아 주고받은 이야기로, 막내고모는 그 계란장수 할머니 맘에 쏙 들어 시집가게 됐던거야. 그 집 식구 되어 잘 살게 된거야. 새벽에 일어나 보리방아 찧고 목화 심고 누에 쳐서 옷 해 입구. 어른들 잘 모시며 김도 매구, 고모부랑 함께 땅도 파구, 얼마 있으면 아기도 낳겠지. 사랑하면서 사니까 사랑한다는 말이 필요 없고, 지나는 나그네 쉴 곳 찾으면 사랑방 치워 드리고 불도 많이 때고 …나는 나대로 새 친구 사귀려구 먹 갈아 붓글씨로 이렇게 편지를 쓰지 않아?
경일아.
어떻게 하면 알아듣기 쉽게 내가 사는 별나라 이야기를 한꺼번에 잘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기다려야 돼. 오히려 내가 서두르고 있는 것 같아. 네가 사는 별나라, 너를 친구로 삼고 싶어서 마음 쓰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자꾸만 서두르게 되나봐. 서둘다 보면 서툴게 되고 서툴게 굴다 보면 될 일도 안되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이야기하면서 오랫동안 지내다 보면 저절로 잘 될거야. 되어지는 것이 좋지, 만드는 것은 좋지 않아. 욕심 부려서 억지로 만들다 보면 잘 될 일도 망가지는 거거든.
경일아.
내가 참 건방지다고 생각되지 않아? 너무 아는 척하구, 어른같이 말하구, 솔직히 건방지다구 생각했지? 내가 생각해두 그런 맘이 들어. 앞으론 좀 겸손해질게. 오늘은 이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