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바라보며 (2002. 6)

집 으 로

구미정


드디어 <집으로>를 보았다.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이성재와 심은하의 또 다른 매력을 잡아냈던 섬세한 감독 이정향의 작품이다. 아무래도 이 여자감독은 서로 이질적인 두 존재간의 만남과 조화라는 화두에 매달린 사람 같다. <집으로>에서 그 화두는 늙고 초라한 벙어리 할머니와 도시문명에 찌든 손자 간의 도저히 공존하기 어려운 대립적 존재양식이 어떻게 화해와 치유로 이어지는가로 되물어진다.
오락기와 정크후드(쓰레기음식), 로보트와 롤러브레이드에 길들여진 상우(손자)는 대단히 버르장머리 없고 폭력적인 아이로 보인다. 영화 초반에서 외할머니를 향해 “병신”이라는 욕도 서슴없이 내뱉는 상우를 보노라니 그야말로 ‘자폐증’에 걸린 현대인같다. 전통이니 역사니 하는 것들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맺기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개인주의 적인 삶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나르시스적 현대인 말이다.
그런가 하면 할머니는 말 못하는 자연을 닮았다. 우리 존재의 뿌리로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 영육간의 자양분을 제공하지만, 기계문명과 소비문화에 의해 철저히 묵살당한 존재다. ‘캔터키 후라이드’가 먹고 싶다는 상우에게 ‘백숙’을 해다주는 할머니는 그야말로 ‘말이 통하지 않는’ 구세대적 삶의 방식을 대변한다. 할머니에게 숨겨진 보석같은 가치들, 예컨대 빼앗겨도 생명을 나누고 양육하는 지혜, 짓밟혀도 생명을 끌어안고 돌보는 힘을 이해하기에는 상우가 너무 어리다. 그 역시도 부모의 이혼과 엄마의 실직으로 외할머니 집에 강제로 떠맡겨져, 가급적 익숙한 것에 몰입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잊고 싶은 가련한 동심이 아닌가?
그런데 상우에게도 할머니의 말을 알아듣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 장날에 자기가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자장면과 초코파이를 먹게 된 것이 할머니의 묵묵한 희생 때문인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을 때, 자기는 오락게임에 미쳐(?) 밧데리를 구하려고 할머니의 비녀까지 훔쳤는데, 그리고도 시골에서는 그런 밧데리를 구할 수 없음을 알고 오락기까지 내팽개쳤는데, 할머니가 그 오락기를 고이 챙겨서 밧데리 살 돈 2천원을 꼬깃꼬깃 넣어두신 것을 확인했을 때, 마침내 상우는 할머니의 사랑에 마음을 열게 된다.
말을 하기 위해선 입과 귀가 필요한 게 아니다. 말은 가슴으로 듣고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오감을 닫고 가슴을 들여다보면 어느새 말 못하는 존재의 속삭임이 가득차 있다. 상우가 할머니의 마음을 읽고 할머니의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따스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말과 글에 문외한인 할머니가 위급할 때 어떤 도움도 요청할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서글퍼 그는 잠도 이루지 못한다. 이제 상우는 남과 ‘교감’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감수성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유아독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할머니의 눈길 하나, 손길 하나도 거부하던 상우 역시 늦은 밤 ‘푸세식’ 화장실을 갈 때면 꼭 할머니를 대동해야 한다. 둘은 공생하기 위하여 서로를 필요로 한다.
생명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관계적’이다. 관계가 없으면 생명도 없다. 예수가 생명을 주러 왔다는 것은 관계를 잇기 위해 왔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 이웃과 소외된 관계를 다시 이을 때 비로소 생명이 살아난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두 세 사람 사이에’ 있다고 했나보다. 하나님 나라는 회복된 ‘관계’ 속에 임재한다.
꾸불꾸불한 비탈길을 힘겹게 오르는 할머니의 굽은 등에서 오히려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상우는 집으로 돌아갔고, 할머니는 다시 오두막에 남겨지지만, 그래도 처음처럼 불안하지는 않다. 아마 할머니의 손에, 상우가 ‘위급할 때 보내라’고 준 엽서가 들려있어서 그런가보다. 밤새도록 자기가 가장 아끼는 로보트 엽서 뒷면에 그걸 그리느라고 상우는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아프다’와 ‘보고 싶다’가 그림언어로 표현된 엽서를 보며 관객들은 희망을 떠올린다. 과거와 현재, 전통과 첨단, 자연과 문명은, 할머니와 상우만큼이나 사뭇 다르고, 또 그런만큼 어울리기 어렵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교감의식이 바탕에 깔린다면, 둘은 아마 ‘지속가능한 미래’를 함께 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미래를 여는 열쇠는 자기를 얼마만큼 개방하여 남(타자, 나와 다른 존재)을 받아들이고 공생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는 것 같다.
이란에 <천국의 아이들>과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있다면, 그리고 중국에 <책상서랍 속의 동화>가 있다면, 한국에는 <집으로>가 있다.
헐리우드식 블록버스터가 판치는 영화판에서 이렇게 소박한 영화를 보며 한번쯤 정서순화를 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 구미정 (기독교윤리학 박사, 햇순 편집위원, 여신협 정의평화위원장, 협성대, 목원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