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순" - 성서 난해구 해설 (99. 2)

1. 영원한 화두(話頭) : 그는 누구인가?

이사야 9:6-7


          

(6)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 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 9:6-7)
성탄이 지나고 난 첫 월요일, 두 사람에게서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한 사람은 현역 장 로로서 평생 성경을 읽어오고, 성경 반포에 남달리 애써 오신 분이고, 또 한 분은 평생 성경 읽고 가르치고 설교를 해 온, 은퇴하신 목사님이셨다. 두 분 모두가 성경을 잘 아시는 분들 인데, 그들이 필자를 보고 {개역}성서 이사야서 9장 6-7 절의 말씀을 펴서 읽으면서, 지난 성탄 예배에서 이것이 인용된 교독문 57번을 읽었는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 다.

우선,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정사'란 말이 무 슨 말인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지금 막 태어난 어린 아기가 어깨에 멜 것이라니, 도대체 그 '정사'는 또 무엇이냐는 것이다. '기묘자'라는 말이 무엇인가 하고 국어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그런 말은 국어사전에는 나오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모사'는, 한 때, '사기꾼'같은 말을 좀 누그러뜨려 완곡하게 표현할 때 '모사꾼'이라고 한 일이 있는데, 바로 그런 모사꾼을 일컫는 것이냐고 물어왔다. 또, 아기의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느니,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느 니, '평강의 왕'이라느니 하는 것은, 말은 어렵지 않은데, 뜻이 너무 어마어마하여, 자기가 과 연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필자에게 이런 문제를 제기한 두 분은 필 자가 성서번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들이 이해하지도 못할 번역을 해 놓은 것이 번역자의 잘못이 아니냐 하는, 자못, 비난과 추 궁이 담긴 항의를 필자에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구절은 장로나 목사에게만 문제가 있는 구절일 뿐만 아니라, 신학자에게도, 성서학자 에게도, 그리고, 물론, 성서번역자들에게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 구절이다. 또 한 편, 이 본문은 자체가 대단히 심오한 뜻을 지지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 하는데, "정사"라는 말을, 일반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무려 22 개의 올림말이 올라 있는데, 우리 본문의 것은 열 번째에 나와 있는 "정사(政事)"이다. 정치 정 자에 일 사자를 쓴 것이다. 정사란 "정치상의 일" 곧 정치(政治)이다. 그런데, 정치를 어 깨에 메었다는 표현은 우리말에서 흔한 표현은 아니다. "중책(重責)을 짊어지다"라는 표현을 상기하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아기는 정치가로 혹은 통치자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장차 그 아기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기묘자"라는 말은 아예 사전에도 없는 말이기는 하지만, "기묘(奇妙)"는 문자 그대로 기이할 기 자에 묘할 묘 자를 쓴 것이니까, "기이하고 묘한 것"이다. 그러니까, "기묘자"란 "기이하고 묘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모사(謀士)" 역시 올림말이 아홉 개가 나오는데 우리 본문의 것은 여덟 번째 나오는 "모사"이다. 꾀할 모에 선비 사 자를 쓴 것이다. 일을 꾀하여 처리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참으로 기이하고 묘한 것은 여기에 사용된 표현이나 용어의 뜻보다는, 바로 우리의 구세주로 오시는 그 분이, 무엇보다도,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 어서, 사람이 성장하는 그 절차를 그대로 밟아서, 우리처럼 살아가는 사람으로 오시었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어린 아기, 산부인과의 간호사가 받아 들고 보여주는 갓난 어린 아기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노출된 생명이다. 어머니나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의 오 랜 보살핌과 양육이 없이는 제대로 성장하지도 못하는 나약한 존재, 의존적인 존재이다. 구 세주께서는 그런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어서,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듯 그렇게 어 머니의 품에서 자란 분이시다. 우리가 아기를 존귀하게 여기는 까닭 중에 하나는 우리 주님 께서 바로 아기 됨을 경험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머니를 존귀하게 여기는 까닭 중에 하 나도 바로 우리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또 그의 이름이 한 두 가지도 아닌, 네다섯 개나 되는데, 그 이름들마저도 보통 작명 과정에서 나오는 이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묘자(奇妙者 the Wonderful)', '모사(謀士 the Counsellor)', '전능하신 하나님(Mighty God)', '영존하시는 아버지(Eternal Father)', '평화의 왕(Prince of Peace)' 이런 이름이다. 영어를 이해하는 독자를 위해 영어 번역을 병기하였다. 오히려 우리말보다 더 쉽게 이해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름들이, 어디, 사람에게 부칠 수 있는 이름들인가? 더욱이, 여인의 태를 통 하여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그 아기의 이름이 "하나님"이라니?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 의 이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니? 왕궁에서 나기는커녕, 오히려 가축의 구유에서 태어난 평민의 아들이 "평화의 왕"이라니? 구약에서는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이의 본질이다. 그러 기에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주님은, 아기이고, 아버지이고, 왕이고, 하나님이다.

구세주로 오시는 아기를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라 고 말하는 점에 있어서는 이사야 뿐만 아니라 신약의 요한복음서도 대단히 자극적이며 도발 적이다. 예를 들면,

요한 1:18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 보이셨다."

요한 20:28 "도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대답하니",

요한일서 5:20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참되신 분을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 해력을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 참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 니다. 이분이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이사야서 9장 6-7절의 이 어마어마한 본문의 뜻을 한꺼번에 다 이해할 수는 없 다. 다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어떤 분인가를 오늘부터 시작해서라도 남은 생애 동안 우리가 계속하여 명상하자는 뜻에서 이 본문의 말씀을 소개하고, 이 말씀의 주인 공이신 그리스도, 그 분이 누구인지, 그가 누구이기에, 우리는 평생 그에게 붙잡혀 있는 것 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우리의 평생을, 아니 우리가 죽은 뒤에도 영원히 우리와 관계를 맺 으시는 것인가?


민영진목사
대한성서공회부총무, 감신대교수(구약신학) 및 대한성서공회 번역실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