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사건 24 (2000. 2)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신11:16-20, 눅12:35-48)

하태영 (목사/삼일교회)

2000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100년 단위의 새로운 세기, 천년 단위의 새로운 천년이 시작 된 해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3박자 단위의 세기적 변화이다. 이처럼 세기적인 변화를 맞 이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세기는 서구문명 중심의 세계관이 세계를 일방적으로 지배한 시대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서구 기독교 문명이―그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든, 부정 적으로 작용했든―세계 역사를 주도해왔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 대에도 서구문명이 세계를 일방적으로 지배하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렇다고 해서 동양문명이 새로운 문명의 중심축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물론 Pax-Americana(미국식 질서의 세계지배)는 향후 반세기는 더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다. 변화의 역동성은 정보 매체의 발달이 주도한다.
정보 매체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삶의 양식들이 혁명적으로 변하고 있다. 모든 지역과 국가와 개인들이 실시간대로 지식과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세계는 일방통행 시대는 끝났다. 모든 소통이 쌍방간에 이뤄진다. 지역간의 유대가 그 어 느 때보다도 밀착될 전망이다. 그러면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와 삶의 가치들 이 공존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이다. 문명의 중심가치도 변하고 있다. 지금까지 문명의 중심가치는 지배-정복-차별-소유의 확장을 추구하였다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 면 인간답게 사느냐'는 '삶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이다. 문명의 중심가치가 변한 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 총체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다. 권력 구조가 바뀐다. 국가라는 개념도 바뀐다. 성 차별적인 남·녀관과 가정이라는 개념도 바 뀐다.
생명공학의 발달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제기한다. 신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존재의식은 담백질 합성과 유전자 조작이라고 하는 기술적 사고에 의해 심각 한 도전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 인류는 지구 환경을 '발전-개발'이라는 대상으로 여겼지 만, 이제는 지구 환경을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게 된다. 인간은 보다 큰 생명체 안에서 살아가는 작은 생명체이다.
우리가 맞이한 새해, 새로운 세기는 이처럼 혁명적인 변화의 물결 가운데 있다. 인류 역사는 흐르는 강물과 같다. 흐르는 강물이 완급이 있고, 낙차가 있고, 굽이가 있듯, 인 류 역사의 흐름도 그와 같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낙차와 굽이가 그 어느 때보다도 크다 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성서 역사 가운데서도 급속한 변화가 감지된다. 신명기 기자는 이렇게 경계하고 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주신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신11:16-17)고. 이집 트 노예생활로 뒤틀리고, 광야 유랑 길에서 지친 백성들이 가나안의 문명세계에 발을 들 여놓자마자 그곳의 안정과 풍요로움에 눈이 휘둥그래져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할 것을 예 견하여 하신 말씀이다.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에 넠을 잃어버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망 각해 버리는 일은 너무나 많다.
우리는 지난 100여 년간 서구의 '새로운' 문물에 넠을 빼앗긴 세월을 살아왔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36년의 식민지 역사는 한민족 역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역사로 기억된 다. 그것은 자기를 망실한 역사요, 자기를 배반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의 심 성은 이 3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비록 해방은 되었지만 지금까지 자기 배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노예근성과, 자기부정(정체성 상실)과, 기억 (성실)을 상실한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신명기 기자는 18절 이하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 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 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신11:18-20). 요점을 말하자면, '너와 네 자자손손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말 라'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세기가 바뀌고, 문명의 중심가치들이 바뀐다 해도 돌아오는 곳은 인간 자신이다. 더구나 새로운 시대는 이전과는 달리 문명의 중심이 인간 자신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망각한다면 "멸망하는 백성"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존재 양식이 있다. 그것은 이웃과의 관계성 속에서 파악되는 존재 양식이다. 베드로 서신의 말씀을 들어보자. "여러분은 모두 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사랑하며, 자비를 베풀며, 겸손하십시오. 악을 악 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비십시오. 여러분으로 하여금 복을 이어받 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습니다"(표준새번역/벧전3:8-9).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여러분이 가진 소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 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오"(벧전3:15b). 이웃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지니고 살라는 것이다. 각 사람의 소망은 각 사람 것으로만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사람 의 소망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소망까지도 공동체 안에서 나눠야 할 몫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 깊이 들어가신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 과 같이 되라"(눅12:35-36). "너희"는 주인을 섬기는 종처럼 살라는 말씀이다. 종의 존재와 행위를 결정하는 중심 요소는 주인이 "혼인 잔치 집에 가 있다"는 데 있다. 주인은 "떠 나" 있지만, 잔치가 파하면 반드시 돌아온다. 지금 주인이 집에 없다고 해서 종이 주인처 럼 처신한다면 주인을 배반하는 일이다. 이런 종은 주인이 돌아왔을 때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만한 두 가지 메시지가 떠오른다. 첫째, 인간은 자기가 자기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주 인'의 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주님께로부터 소명 받 은 일꾼들이다. 일꾼은 주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 고 취하게 되면," 이런 종은 이미 주인을 배반한 것이다.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다.
새로운 천년이라고 해서 저절로 시대가 밝아지는 게 아니다. 인간 존재가 달라지는 게 아니다. 인간은 여전히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인간은 아무리 큰 꿈을 지 닌다 해도 장구한 시간의 한 귀퉁이만을 살다가 갈 존재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이 세 마디는 새로운 천년이라고는 하지 만, 변함없이 어둠이 상존 하는 '시대성'을 상정한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인간의 존재 양식과, 행동 양식을 지시한다. 이제 인간은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오만을 버 려야 한다. 다른 사람, 다른 민족을 지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우리 모두는 섬기는 사 람, 봉사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동료 인간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함이 풍 요로운 삶을 약속할 것이다. 봉사하는 삶만이 인류 역사를 편안한 길로 인도할 것이다.

19 물 한 잔에 담긴 뜻은(마25:31-46)

20 베드로 콤플렉스-겸손의 사회학(눅14:11)

21 교인은 많은데 그리스도인은 없다?(눅12:1-12)

22 '시간의 역사' 속에 담긴 기적을 탐구하라(행14:8-18, 롬11:33-36)

23 사랑 때문이라고?(창6:5-12, 막7:15-16)

24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