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0:17-28, 엡 4:11-12)
하태영 (목사/삼일교회)
4 . 13 총선을 앞둔 정치권이 시끌법석이다. 이미 공천에서 탈락한 이들의 분노의 목소리가 불 꽃 튀더니, 이제는 선거전에 뛰어든 이들의 연설이 '막가파식'이다. 상황이야 어쨌든, 공천에서 탈락한 이들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 대부분이 정계 중진들이요, 정치에 관록이 있는 사람들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들의 항변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일생 동안 정치를 업으로 삼은 사람 들이 '낡은 정치인' '부패한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정치 생명이 끝난다 싶으니 억하심정일 것이다. 그 절차 또한 밀실에서 이뤄졌으니 더더욱 분개할 일이다. '내가 이렇게 당하다니!'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분통터지겠는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권력의 속성이 그런 것을, 요즘 사람들만 그런 게 아 니다.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역사는 권력 쟁탈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 다.
마태의 기록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도 권력 다툼을 하고 있다. 심지어 예수의 가까운 친인척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까지 개입해서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인사 청탁을 하고 있다. 이들은 예 수께서 당신의 고난을 예고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제자들 사이 에 팽팽한 긴장이 감지된다. 예수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권력 다툼을 했다는 것은 여간 유감스 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이런 권력 다툼을 통해서 예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면 하나의 큰 소득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서로 다투고 있는 제자들을 불러다가 말씀하신다. "이방의 집권자들은 저희를 임 으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유력자)이 제 마음대로 권세를 부리지만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마태 20:25). 권력의 속성을 이보다 더 깊이 통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 마음대로' 세도를 부려 보 고 싶은 욕망의 분출구로서 권력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왔다"(마 20:28)고, 저 유명한 '섬김의 삶', '봉사의 삶'을 제시하신다. 사실 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위해 서 살아야 하는가?' 라는 도덕적인 가르침 이상의 혁명적 발상이 담겨 있다. 바깥 세상을 뒤바꾸 는 혁명이라기보다는 먼저 개개인이 자기 내면으로부터 자기를 혁명하라는 요구이다. 하지만 온 천하를 발아래 복종시킬 메시야를 대망 했던 유대인들로서는 상상키 어려운 제안이다. 그때까지 유대인들은 지배자가 되느냐 아니면 복종하는 자가 되느냐 하는 이분법적인 세계관 속에서 살았 다. 섬기는 자로서의 메시야란 저들의 사전 가운데는 없는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제자들은 예 수에 대해서 끊임없이 오해로 일관한다. 개중에 몇 몇은 몹시 실망하고 "그럴 수 없다!"고, "선생 님이 고난을 받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고 길을 가로막기도 했다. 어쨌든 섬김의 삶을 제시하게 된 문맥이 제자들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적어도 마태의 관 점에서 "섬김의 삶"은 '권력'에 대한 전혀 새로운 패라다임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섬김"(봉사/diakonia)을 "겸손"(비움/kenosis)이라는 새로운 삶의 가치로 재해 석한다(빌 2:7-8). 예수의 섬김은 '자기 비움' 곧 겸손에서 비롯된다고 본 것이다. 예수께서 제시한 섬김의 삶이 유대인들의 세계관을 뒤집은 것이라면, 바울이 제시한 겸손의 삶은 헬라인들의 세계 관을 뒤집은 것이다. 바울 당시 헬라인들이 으뜸으로 여긴 덕목은 '용기'였다. '용기'는 '겸손'의 반 대 개념이다. 용기는 주인 신분으로 사는 미덕이지만, 겸손은 종의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 이 지녀야 할 굴종의 미덕이다.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겸손은 곧 권력 포기 선언이다. 또한 바 울에게 있어서 겸손 없는 봉사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바울이 봉사에 대해서 가장 명료하게 정의한 대목은 아마 에베소 4장 12절일 것이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준비시켜)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앞 에서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세워)주셨 으니"라고 하였다. 각각의 직분은 봉사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봉사의 가장 큰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마지막까지 충성케 하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봉사의 삶이 단지 기능적인 것이 아닌, 성서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들이 통상 생각하는 '역할로서의 봉사'가 얼마나 협소한가를 보게 된다.
예레미야의 예를 들어보자. 예레미야는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았을 때, "나는 나이도 어 리고, 말이 둔하여서 도저히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1:6)고 나서지를 못한다. 하지만 일단 소명이 선 뒤로는 백성들과 권세자들을 향해서 목숨 걸고 저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있다. 사실 예레미야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출세길이 보장되어 있었음에도 예언자 활동을 하면서 혹독한 고문과 능멸, 투옥과 추방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의 지성과 양심이 살아 있었고, 하나님을 향 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이 불타올랐으며, 이스라엘 민족이 비참하게 되는데 대한 깊은 슬픔을 지 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진 박해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봉사의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 당했다. 그리고 그 같은 봉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신앙정신이 시들지 않는 밑거름이 되었다. 바 로 이렇게 목숨 걸고 하는 예언활동이 예언자로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 서신에서도 예언자들과 같은 '고난의 봉사'를 본다. 서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 여하는 줄로 알고 즐거워하라"(벧전 4:12-13).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박해 받는 일은 일상 사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고, 시련을 당할지라도 오히려 기뻐하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박해라는 극한 상황을 맞이하면 사람들은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 수를 믿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 자체를 후회할 수 있다. 동료를 원망하고, 비겁자가 되어 도망칠 수 있다. 베드로 서신은 이런 일을 너무나 많이 목격했 을 것이다. 서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4:16).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받음을 "부끄러워 말 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신앙 행태는 어떤가? '예수 믿으면 만사 형통한다'는 거짓 축복에 익숙해 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받는 건 그만 두고서라도, 예수 믿는다면서도 시련 겪는 걸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허위의식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 교회는 봉사를 많이 강조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세속적인 봉사를 앞세 우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세상의 칭찬을 받기 위해 혹은 목회자의 성공과 교회 성장의 방편으 로 하는 봉사가 많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봉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의 인정을 받는 봉사라도 그 목적이 세상 중심이라면 참 된 봉사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봉사와 섬김에 대한 전혀 새롭고도 놀라운 관점을 목격했다. 봉사의 최고봉은 역경 가운데서 더욱 빛나는 신앙, 치명적인 손실을 입으면서도 기뻐 하는 신앙 곧 '고난으로 드리는 봉사'라는 것이다. 봉사를 강조하는 한국 교회가 유념할 일이다.
21 교인은 많은데 그리스도인은 없다?(눅12:1-12)
22 '시간의 역사' 속에 담긴 기적을 탐구하라(행14:8-18, 롬11:33-36)
23 사랑 때문이라고?(창6:5-12, 막7:15-16)
24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48)
25 물같은 성령(눅12:35-48)
26 고난으로 드리는 봉사(마20:17-28, 엡4: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