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3:3-15, 롬12:1-2)
하태영 (목사/삼일교회)
솔로몬이 그립다. 솔로몬의 지혜가 그립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사들의 진료거부 행위 가 벌써 석 달을 넘기고 있다. 의료수가는 이미 세 배 이상 올랐는데도 저들은 여전히 막무 가내다. 이보다 더 실망스런 배신이 있을까? 믿음에 대한 배신이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지 금 우리 사회 기득권 층의 정신 상태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 짐작케 한다. 정치권은 어떤가? 민생 현안은 뒷전으로 미룬 채 연일 지루한 공방뿐이다. 교계 풍토는 한 발 더 뜬다. 자기만 옳다며 다른 견해는 사탄으로 매도해버린다.
우리 시대는 지금 저마다 자기 몫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 중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대화다운 대화를 찾아보기 어려워서다. 어딜 가나 산 아 이가 내 자식이라며 반쪽씩 나눠 갖자고 억지부리는 이들이 넘친다. 솔로몬이 있었다면 꼬 인 실타래가 풀릴 수 있으련만, 어디에도 솔로몬의 지혜는 없어 보인다.
이왕 솔로몬 얘기가 나왔으니 '솔로몬의 지혜'를 좀더 생각해본다.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 어 왕이 된 솔로몬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송사를 바르게 재판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심한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 다윗의 신앙 정신이 서려 있는 기브온 산당에 올라가 번제 를 드리며 지혜 얻기를 구한다. 번제란 무의식중에 지은 죄를 속죄 받기 위해서 제물을 불 태워 연기로 드리는 제사이다(레1:6-8:13, 18-21). 이런 번제를 1천 번 드리고 잠들었는데 꿈 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신다. 솔로몬의 대답이다. "종은 아비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아직 나이도 어리고(당시 20세) 분별력도 없습니다. 백성들의 수효는 많은데 이 많은 사람들의 송사를 어떻게 바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제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백성들에게 선악을 분별하게 하소서"(왕 상3:16-18).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너무나 흡족하여 "네가 장수를 구하지도 않고, 부귀를 구하지도 않고, 원수갚기를 구하지도 않고, 오직 지혜를 구하였으니 지혜뿐만 아니라 장수와 부귀와 영광까지도 주마"고 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솔로몬이 구한 지혜의 성격을 살펴보아야겠다. 개역성경에서 솔로몬이 구 한 "지혜로운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 샤마"(leb shama)이다. "듣는 마음" "경청하는 마음 "이다. 일본 개역판 성경은 "듣고 깨닫는 마음"이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솔로몬의 지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복잡한 수학공식을 척척 풀어 가는 '영특함'이 아니다. 자연 법칙을 꿰뚫어 보는 '초능력'도 아니다. 물론 손오공이 수 만리 떨어진 삼장법사를 찾아가서 구한 진기한 '묘법'도 아니다. 그가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 구한 지혜는 백성들을 압도하는 신통력 이 아니라, 듣고 깨닫는 마음,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삶의 진실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마음이 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서가 전승하고 있는 지혜(chokma/호크마)는 헬라인들이 말하 는 지혜(sophia/소피아)와는 구분된다.
세속사회에서 통용되는 지혜는 어떤가? 어떤 방편을 지혜로 여긴다. 힘의 역학 관계에서 교묘히 풀어 나가는 묘수를 지혜라고 한다. 책사(策士)들의 지혜, 모사(謀士)들의 지혜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구한 지혜는 '삶의 진실에 대한 신중하고도 책임 있는 응답'이다. 실존의 깊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를 겸허하게 듣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솔로몬과 같은 통치자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백성의 소리, 민중의 소리를 겸허하게 경 청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가 일국의 제왕으로서 존경을 받았다면 바로 이런 '경청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솔로몬의 지혜는 '자기 마음을 통제하는 능력'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 누구든지 자기 마음을 통제하지 않고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없다. 인 간사의 시시비비를 편견 없이 볼 수도 없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요, 그래서 종교적인 일이다.
우리는 이따금 어떤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장면을 본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저마다 자기 편리한대로만 억지 말을 굴리는 모습이다. 토론이 아니라 말장난 이다. 자기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서 궤변을 늘어놓고, 왜곡된 주장을 하고, 상대를 거꾸러뜨 릴 생각만 하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갈등의 문화, 투쟁의 문화에 젖어 산다.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도 일종의 지혜는 지혜일 것이다. 하지만 세속적인 지혜요 영특한 지혜이다. 이런 지혜는 투쟁에서는 이기고 진실에서는 지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 사회의 복잡한 문제 의 근원은 이런 데 있다고 말하면 틀린 생각일까?
솔로몬은 세속적인 지혜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왕권'의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 의 승리를 위해서 지혜를 구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없는 자가 억울 한 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혜를 구했다. 그리하여 자기 마음을 온전히 통제하기를 바라고 1천 번의 번제를 드린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 행위의 깊은 차원이 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신앙 행태는 어떤가? 너무나 가볍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욕구 충족을 위한 방편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경향이다. 값싼 신앙이요, 냄비와 같은 신앙,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신앙이다. 깊이가 없으니 권위로 버티는 신앙이다. 그리하여 권위의 포로가 되어 다 소만 비판을 받아도 좀처럼 노여움을 풀지 못하는 이들이 곳곳을 가로막고 있다. 이런 신앙 행태는 신앙 자체를 오염시켜 천박한 것으로 만든다. 매사에 이기기는 하지만 사회 공동체 에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승리하는 데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당장 얻고 잃음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처서 복종시키는 수련이다. 이런 측 면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황금률과 같은 말씀들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자기 마음 을 온전히 통제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가슴에 착상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 역 시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삶, 균형 있는 삶을 가르치면서 끊임없는 마음의 통제를 역설하고 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룩산 산 제사로 드리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 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 별하도록 하라"(롬12:1-2). 바울 역시 마음 다스리는 '분별력'을 말한다. 솔로몬이 구했던 지 혜가 바로 분별력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이들의 생활은 건강하지 못하다. 정신도 온전하지 못하다. 부정과 부패가 이들 주변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남을 괴롭히고, 혐오감을 유포시키는 일도 이들 몫이다. 성서는 이런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죄악의 뿌리로 여긴다. 믿는 이들이 차고 넘치면 무얼 하는가? 성령의 능력이 차고 넘치면 무얼 하는가? 솔로몬처럼 "경청하는 마음"을 구하는 이들이 그리울 따름이다. (이 글 이 독자들 손에 들어갔을 때는 의사들만이라도 환자 곁으로 돌아가 있기를 바란다)
25 물 같은 성령(눅12:35-48)
26 고난으로 드리는 봉사(마20:17-28, 엡4:11-12)
27 제멋대로 폭발하는 생명에너지(골2:1-3)
28 부활체험-<너> 안에서 죽은 <나>의 소생(눅24:13-35, 요15:6-11)
29 날마다 영으로 만나다(행13:26-33, 요21:1-14)
30 하나님의 영이 떠나지 않게 하라(사32:9-18, 요16:16-24)
31 진리 안으로 들어가라(욥28:12-28 요8:32, 행17:16-34)
32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다(마8:9-13, 엡2:1-11)
33 솔로몬이 그립다.(왕상3:3-15, 롬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