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삶의 뜨락 (2001. 4)

생명창조 여인들의 길

박미현

나는 20살이 되던 해, 약사가 되라는 부모님의 뜻을 저버리고 성직자가 되겠다고 성공회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갈 길을 생각하면 '주무시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신다는 부모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헤아릴 수 없었다. 그저, 소망이 깊으면 다 이루어주시리라 믿었다.

그러나 곧 대학을 다니며 나는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성공회 성직 후보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교회에서 열심히 일해도 성직 후보생에게 지원되었던 장학금은 내 것이 아니었고, 이후 대학원 과정을 모두 마친 졸업 후에도 다른 남자 동기들처럼 전도사 발령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부제고시.. (성공회에서는 사제가 되기 전에 부제라는 과정이 있다) 부제고시를 보기 위해서는 교구 추 천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바로 이 단계에서 추천이 거부되었다. 대한 성공회 헌장 법규에 여자에게 성직서품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자에게 성직서품을 할 수 없다는 조항도 없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품을 받기 위 한 길에 한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 부제 고시라는 시험을 조기 위한 노력을 하였고 1994년 대한 성공회 역사이래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부제고시에 합격하였다. 이 합격은 나의 선배인 유명희 선배님의 부제고시 판정 보류를 딛고,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유명희 선배님은 역시 성공회 여성사제 지망자로서 부제 고시를 치른 후, 역시 여자라는 이유로 합 격 판정 보류라는 통지를 받았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는 달리 나의 부제고시 합격이 서 품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 후로부터 나의 긴 기다림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계속되 었다. 난 내가 반드시 서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선배님들이 버텨 주어서, 내가 부제고시라는 과정을 치르고 합격을 한 것처럼 나도 누군가가 딛고 갈 수 있 는 '징검다리가 되어 주는 것'까지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 동료들이 부제가 되고 남자 후배들이 사제가 되어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활동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때 창조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창세기 16장 8절의 말씀이다. "사라의 종 하갈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바로 이 말씀은 하느님께는 아이를 낳지 못하 는 사라와 이방여인이고 종이고 씨받이인 하갈의 고통과 한을 알고 계시며 그녀들의 부르짖 음을 들으시고 돌보신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말씀이 나를 긴 시간 홀로 서 있을 수 있는 힘으로 내게 온 것이다.

또한, 로마서의 말씀은 나에게 도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누 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제외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감 히 여성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 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이런 확신이 혼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성공회라는 이름 아래 만난 여성들은 내가 지 칠 때마다 생명의 떡과 꿀을 먹여 주었고, 나와 찬 서리와 비바람을 기꺼이 함께 맞아 주었 다. 그동안 그녀들과 함께 교회 전반의 여성활동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였고, 성서교실을 열 었고, 여성 정책 회의를 하였고, 대한 성공회 여성사를 펴냈으며, 전 교인을 대상으로 여성 성직 서명 운동을 벌리고, 의회에 안건으로 상정하는 등등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하여 1999년 끝자락에 드디어 성공회에서도 여성 서품을 허용하게 되었다. 여성서품이 허용되자 모든 일 이 끝난 듯 하였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것을.

긴 기다림의 과정에서 20살 미현이는 강한 여자이고 싶었다. 어떤 어려움도 맞서 싸워 이겨 내는 여성전사이고 싶었다. 그러나 30살 미현이는 부드러운 여자, 본래의 모습을 다시 찾아 가기 시작했다. 어떤 어려움도 감싸안을 수 있는 나무(나의 아들의 애칭이다.)의 엄마이고 싶다.

기다림의 과정에서 하느님은 나에게 강함은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 셨다. 강함은 싸움을 부르지만 부드러움과 사랑은 거룩한 분노와 생명을 부른다는 것을 나 에게 알려 주셨다.

이제 함께 이 길을 가는 여러 명의 자매들이 생겼다. 그녀들이 자신들이 가는 이 험한 길에서 상처받지 않기를 나는 항상 기도한다. 아니,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고 치유하여 새로운 생명을 창출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 생명력이 세상 곳곳으로 전염되리라 확신한다.

우리는 하와, 생명을 창조하는 여인이다. 나는 오늘도 나의 사랑하는 동근 가슴과 몸으로 나의 사랑하는 아기 나무를 키우듯이 나의 생명력을 키운다.


* 박미현 전도사 / 성공회대학 신학연구소 연구원 /
현재, 성성종 부제(성공회)님과 아름다운 아기 나무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대한성공회 여성사제 서품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