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연목사
올 여름은 무더위와 장마가 다른 해보다 일찍 찾아왔다. 기상이변 때문이 아니더라도
세월이 갈수록 사계절의 변화에 더욱 예민해지는 것 같다. 어릴때는 일상에 묻혀 시간의
흐름에 둔감했다. 계절의 변화에 대해서도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생활의 활력을 주는 것
이상의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인생의 반을 넘게 살아온 지금은 작은 것에도
민감하다. 마음속의 시계는 오늘이 종말인 것처럼 바쁘게 돌아가고, 지나는 바람결과
내리는 빗줄기 한가락조차도 몸과 마음을 자극하며 지나친다.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그것들이 나와 무슨 깊은 인연이라도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다시 읽은 로마서 12장이
나의 삶의 지표로서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 것도, 지금까지 나의 삶의 역정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서 12장은 신학교시절,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영혼을 일깨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1절)"는 말씀은 나를 공장으로 이끌었다. 군부독재아 래 인권탄압의 사각지대 중의 하나였던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가 되는 것이 내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2절)"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나에게 구로공단에서 노동을 하며 닭장집에서 자취를 했던 경험은 넓은 세계를 봄과 동시에 그 속에서 나의 위치를 깨닫게 해준 소중한 체험이었다.
나를 이끌었던 바울의 "거룩한 산제사가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1절)"라는 말씀은 그 당시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초대교회 유대인 신자들은 금지된 음식과 성일의 준수를 지나치게 고집하였다(14:2-6). 제물로서 자신의 죄가 속죄된다고 믿었던 유대인에게 "너희 몸을 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속죄양으로 드려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제물로 바친 몸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시느냐에 따라야 한다'는 말씀으로 다가 왔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의 뜻일 것이다. 나는 부흥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무엇이 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낮춘다고 노동자가 되었다. 2년여 동안의 공장생활...위장취업으로 해고되어 출근투쟁을 하다 경찰에 연행...그 뒤 우여곡절 끝에 선배의 도움으로 노동자들과 함께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 됨을 배웠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면" 내가 내힘과 의지로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거룩한 산제사"로 나를 하나님께 드릴 때, 온전히 그분의 뜻이 나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지금의 자리가 내가 제물이 되어야 할 제단인 것이다.
끝으로 나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해준 강조하고 싶은 구절은 평화란 위치를 바꾸지 않으면 볼 수 없고,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16절)는 말씀이 그것이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의 형편을 헤아리고, 권력없는 사람들의 편에 서고, 인종차별을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듣고, 굶주리는 인류와 가부장제 아래에 있는 여성의 현실을 보고 느끼며, 환경재앙이 다가오는 인류의 미래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며 서로 사랑하고 더불어 평화"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모양으로 쓰시든지 나의 몸을 산제사로 드려 함께 즐거워하며 함께 울고, 모든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고 싶다.
* 김주연목사는 감신대를졸업하고 지금은 인애감리교회 부담임목사로 수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