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규 연재동화 (2000. 9)
아버지의 향기
제2부
<11>
한 번 뱉어진 말은 되 담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말은 이 사람한테서 저 사람에게 전해
지면서 살이 붙게 마련이다. 좋은 말은 더 좋은 쪽으로, 안 좋은 말은 더 안 좋은 방향으로
좋은 말보다 더 많은 양으로 보태진다. 그렇게 불어난 말은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
말은 안 좋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시계를 왜 뒷간에 빠쳐?
"걔가 좀 의뭉스럽다구. 언젠가는 글세 집에 와서 저희 할머니더러 학교 뒤 대밭에 대꽃
이 피었다구 뻥을 깠대야."
"그려, 그 말은 나두 들었어. 그러자 걔 할머니 한다는 소리가 '그렇구나, 해방풍(태풍)이
불더니 해방이 되더니만 대꽃이 피었으니 난리가 끝나겠구나. 대꽃이 피면 죽실이 열리구,
죽실이 열리믄 봉황이 날아 오겄지. 봉황이란 새가 죽실을 먹거든, 상서러운 일이니 난리 끝
날 징조가 아니겠느냐? 허구 맞장구를 쳤대야."
"그 할미헌티 그 손자구, 그 손자에 그 할미구만 그랴."
"애들 너무 귀허게 키우다 큰일 나지. 결국은 도둑으루 키웠네 그랴."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했고,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다. 말은 참
힘이 세다. 나는 결국 경호의 시계를 잃어버린게 아니라 팔아먹었고, 그 돈으로 아이스케키
와 자장면을 사먹었으며 서울에서 온 방앗간집 손님의 시계까지 훔친 도둑이었다.
"버선목이나 돼야 뒤집어 보이지?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고 계셨다. 새벽 일찍 일어나 마당
을 쓸고, 지게를 지고 들로 나가셨다. 콩그루를 남겨두고 논둑을 깎거나 길가의 풀을 베어다
퇴비를 보태셨다. 그렇게 베어 온 풀이 농약이 닿지 않는 것이면, 겨울철 쇠죽대신 신선한
꼴이 되어 소먹이가 되었다. 어머니도 콩밭을 매거나 콩 밭무를 뽑아다 열무 김치를 담그고,
어쩌다 달게 익은 참외를 따서 찬 우물에 담갔다가 할머님께 드렸다.
"아가, 참외 먹자."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싫어"
나는 돌아누웠다. 참외뿐만 아니라 밥맛도 없었다. 무엇이든 먹으면 토하기 일쑤이고, 자
다보면 식은땀이 흘렀다. 할머니가 어느 날 어머니를 부르셨다.
"에미야, 이러다 큰일 나겄다."
"그래두 전 말 못혀유. 단방에 생 난리가 날 걸유……."
어머니가 손을 맞부비며 말끝을 맺지 못했다.
"안되것다, 내가 나서야지. 이러다 애 죽여……."
할머니가 드디어 아버지를 부를 결심을 하신 것이다.
" ……."
어머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이러다가 호미루 막을 일을 가래루두 못 막어."
할머니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시게 되는 날, 나
는 정말 갈 곳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