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규 연재동화

강정규 연재동화 (2001. 7)

천천히 가그라

1학년 때 똥을 쌌다.
단군왕검과 홍익인간, 강감찬과 살수첩, 김유신과 삼국통일, 세종대왕 과 한글창제, 이순신, 임진왜란 등 여느 때와 같이 끝없이 이어지는 팔 자수염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참지 못했던지, 아니면 전날 증조 할머니 제사 음식을 많이 먹었던지 여하튼 나는 대운동회날 만국기 밑에 서서 똥을 쌌다. 달리기도 못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똥장사.

2학년 때 달리기에서 8등을 했다. 3학년, 4학년, 5학년 때도 8등을 했 다.
여덟명이 한 조였으므로 그것은 꼴찌를 의미했다. 그런데 6학년 때 이 변이 일어났다. 여섯 해 동안 한번도 빠짐없이 운동회 구경을 오셨던 할 머니가 갑자기 일어나시며 관중석에서 소리를 치셨던 것이다.

"일등이다. 우리 잉규(仁圭)가 일등여!"

나는 분명히 맨 앞에서 뛰고 있었다. 이를 옹물고, 상을 찌푸리고, 두 주먹을 쥐고 뛰고 있었다. 그런데 내 뒤를 하나, 둘, 셋, 넷... 여덟 명이 바싹 뒤쫓고 있었다.
그것은 다음 조였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또하나.
똥장사는 일등!

대운동회날은 으레 비가 왔다. '일등'하고 비 맞으며 돌아오는 길, 할머 니가 말씀하셨다.
"천천히 가그라. 꼴찌두 괜찮여. 서둘다 자빠지면 너만 다쳐. 암만 늦 게 가두 네 몫은 있능겨. 앞서 간 애들이 다 골라 간 것 같아두, 남은 네 몫이 의외루 실속 있을 수 있능겨. 잉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