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규 연재동화 (2002. 1)

약수터 가는 길(3)



우선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어야 돼. 만나보고 싶지만 만남볼 수 없는 사람이 있어야 돼. 그래서 오랫동안 그 사람 생각을 해야 돼. 그러다가 다른 방법은 없고, 하고 싶은 말은 쌓이고, 그럴 때 편지를 쓰게 되는거야.
먼저 할 이야기를 정리하며 먹을 갈아. 벼루를 꺼내 놓고, 깨끗한 물을 붓고, 먹을 가는거야. 아주 천천히 먹을 가는거야. 먹을 갈면서 편지를 받아 볼 사람 얼굴을 그려 봐. 그 사람 생각만 해.
말할 때 입모양이 어떻고, 걸어갈 때 걸음걸이가 어떻고, 밥 먹을 때 앉음새가 어떻고, 잠 잘 때 두 손을 어떻게 놓고 자는지. 그리고 웃을 때면 이빨이 몇 개 보이고, 신발의 뒤꿈치가 어떻게 닳는지. 모두모두 생각하는거야.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그려 보는거야.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먹을 쥔 손의 힘을 빼고, 아주 오랫동안 먹을 갈다 보면 먹물이 어느새 진해져. 그러면 붓을 들어 끝에서부터 먹물을 묻히는거야. 마른 붓끝이 서서히 불어나서 풀리도록 조금씩 먹물을 묻혀. 그리고, 붓끝을 골라 글씨를 쓰기 시작하는거야. 정성을 쏟아 편지를 쓰기 시작하는거야.
경일아.
너의 모습이 눈앞에 보여.
아빠와 함께 새벽 산책을 나선 너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
네가 사는 아파트와 놀이터도 보이고, 등이 굽은 수위 아저씨도 보여. 우유 배달 아주머니의 자전거는 빨간색, 천군사의 약수터에 놓인 플라스틱 물바가지는 노란색, 모두모두 보여. 알록달록 무늬의 다람쥐도 보이고, 숲 속의 새 소리도 들려. 천군사의 염불 소리도 들리고, 산 너머 특별시 사람들이 모이는 약수터의 나무 의자도 보여.
네가 병아리를 기르고 싶어하고 개를 키우고 싶어하고, 말을 타고 싶어하는 것까지 나는 알아.
그만큼 알아야 돼. 그만큼 좋아해야 돼. 그만큼 좋아하면 그만큼 알게 돼. 그만큼 알고, 그만큼 좋아하는데 정작 만날 수 없을 때 편지를 쓰는거야. 그래서 쓰는 편진데 어떻게 아무렇게나 쓸 수 있겠니?
경일아.
내 친구가 되어줘.
어떻게 하면 내 친구가 될 수 있느냐구? 그건 간단해. 내가 보내는 편지를 받아 보고, 내 생각을 하면 돼.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만큼 너도 내 생각을 해주면 되는거야. 알겠니?
경일아.
그런데 너는 나를 모르지?
그래서 내 생각을 할 수 없다구?
그래 맞았어.
나는 너를 웬만큼 알고 있지만 너는 나를 알지 못하거든. 그렇지만 너무 서두르진 말아. 급하게 서두르면 모든 것을 자세히 알 수 없게 돼. 더구나 깊이 알 수는 없어. 천천히, 시간을 보내면서 아주 천천히 욕심 부리지 말고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저절로 모든 것을 알게 돼. 그렇게 되기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돼.
경일아.
오늘 벌써 너는 많은 것을 알게 됐잖니? 내가 해 뜨는 별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너와 같은 나이로 열두 살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너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까지도. 그리고 또 나는 너를 웬만큼 알고 있다는 것,이런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너는 이미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는지도 몰라. 혹시 편지를 읽어가다가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니?
경일아.
내가 너무 함부로 지레 짐작했다면 용서해. 나 혼자서 너를 알고, 너는 나를 누군지도 모르는데, 건방지게 이런 편지를 쓴다고 생각한다면 나를 용서해. 내가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네 앞에 나설 수는 없지만, 이렇게 편지를 통해 나를 알릴 수 있을거야. 그래서 우선 나를 알릴 수 있는 데까지 알리려고 해. 내 소개를 하려고 해. 그렇다고 해서 내 주소나 이름이나 체중이나 신장이나 가슴둘레나 혈액형을 밝힌다고 해서 간단히 설명이 끝날 수는 없을거야. 내가 누구냐는 물음에 산수같이 간단한 해답은 있을 수 없거든.누가 누구를 안다는 것은 아주 복잡해. 쉽고 간단한 대답이 있을 수 없다는거지. 이해할 수 있겠니?
그래서 나는 생각다 못해 우리 해 뜨는 별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이야기해주기로 했어. 오늘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거야.
경일아.
나는 방금 우리 해 뜨는 별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이야기하겠다고 썼어. 그런데 생활이라는 말은 아주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어.
간단하게 말하자면 의,식,주를 의미해. 입고 사는 옷에 대한 이야기, 먹고 사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사람이 사는 집에 관한 이야기 등이야. 그런데 이것도 그저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음식을 먹고, 어떤 집에 사느냐는 것만으로는 자세한 설명이 될 수 없어.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추위나 더위를 막기 위해 입은 옷이야 별 차이가 없어. 그리고 영양을 섭취하여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먹는 음식의 이름이나 종류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모든 설명이 끝나는 것도 아니야. 그리고 또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막고 도둑이 들어올 수 없도록 벽과 지붕을 만들고 사는 집에 관한 이야기도 간단한 것은 아니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름과 나이와 키와 몸무게 등을 말해주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을 알 수 없듯이, 의ㆍ식ㆍ주에 관한 설명도 그렇게 간단하게 끝날 수는 없다는 얘기지.
경일아.
답답하지? 그렇지만 기다려야 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저절로 알아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주 신비한 곳이거든. 자세히 보면 볼수록 아주 신비한 것들로 가득 찬 곳이란 말이야. 그것은 내가 사는 우리 해 뜨는 별나라나 네가 사는 그곳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넓은 우주 속에 수많은 별나라, 그 어느 별나라에 사는 사람이든 겉으로 나타난 사는 모습은 서로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해. 다만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으며, 남과 다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손목이 아파 와.
붓글씨를 쓰기는 어려워. 어깨도 아파 와. 그러나 오늘 할 이야기는 오늘 해야 돼.
오늘은 우리 가족만 소개할까 봐.
우리 집은 웬일인지 대대로 외아들이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계속해서 외아들이었대.
할아버지는 아빠가 청년이 되자 할머니를 시켜 예쁜 며느리감을 고르게 하셨대. 예쁘기만 해서도 안되고 마음씨가 고와야 했어. 마음씨만 고와도 안되고 튼튼해야만 됐어.
할머니가 어떻게 며느리감을 골랐는가는 여기서 얘기할 수 없어. 나중에 기회가 있을거야. 여하튼 우리집에는 얼굴이 예쁘고 마음씨가 곱고 튼튼한 며느리가 들어왔어. 그런데 아기가 없는거야. 그래서 엄마와 아빠는....아니야. 아직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니까 엄마와 아빠는 아니지. 그러니까 젊은 부부는 산신령님께 기도를 했어. 어떻게 기도를 했느냐하는 이야기도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해. 여하튼 백일 기도를 드려 아기를 얻게 되었는데 아들이었어. 이제야 젊은 부부는 엄마와 아빠가 됐지. 그래서 엄마와 아빠는 아이를 정성들여 키웠어.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지. 그래서 서당에 다니게 됐지. 서당이라고 말고 학교라고 하자. 그래, 학교에 다니게 됐지.
그런데 할아버지가 병이 나셨어. 음식을 잡숫지도 못하고 돌아가실 지경이 됐어. 백 가지 약이 효력이 없었대. 엄마와 아빠는 다시 산신령님께 빌었어. 할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어. 먹지도 지지도 않고 할아버지만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며 빌었어. 빌다 지쳐 쓰러져, 산골짜기에 쓰러진 채 잠이 들었어. 그런데 꿈에 산신령님이 나타나신거야. 아들을 태어나게 할 때 나타나셨던 그 산신령님이 말씀하셨어.
네 아들을 삶아 드려라.
아빠와 엄마는 소스라쳐 잠이 깼어. 청천벽력이었지. 그러나 아빠와 엄마는 산신령님의 뜻을 따른거야. 몇 날 몇 밤을 울며 지새우다가, 할아버지는 한 분뿐, 아이는 또 낳으면 되겠지, 아이를 주신 분도 산신령님, 그 아이를 달라는 분도 산신령님, 그 산신령님께 빌면 또 다시 소원을 들어주실 것으로 믿고, 아빠와 엄마는 산신령님의 명령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했어.
학교에 간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아빠와 엄마는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있었어. 엄마, 하고 아이가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어. 아빠가 눈을 질끈 감고, 아이를 덥썩 안아다 물이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 속에 넣어버렸어. 불을 지피던 엄마가 까무러쳤어. 아빠도 넋을 잃고 부엌 바닥에 주저앉았어. 비가 내렸어.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며 천둥 번개가 번쩍, 우르르 쾅, 번쩍, 쾅!
엄마와 아빠는 아이의 뼈를 추스려 뒤꼍에 묻었어. 아주 작은 무덤을 만들었지. 며칠을 계속해서 비가 내렸대.
할아버지 병환이 나아갔어. 날이 개자 엄마와 아빠는 다시 들에 나가 일을 했지. 땀을 흘리며 일을 했어.
"아버님께서 아이를 찾으셔서 외가집에 보냈다고 말씀드렸어요."
엄마가 말했어.
"우리 다시 산신령님께 기도를 드립시다."
아빠가 말했어.
"산신령님께서 아이를 다시 태어나게 하신대도 그 때 그 아이는 아니잖아요? "
엄마가 울며 말했어.
"그렇긴 그렇지만 어쩌겠소."
아빠도 울며 대꾸했지.
그 때였어. 고개 마루 언덕길을 구르듯이 뛰어 내려오며 아이가, 그 아들이 엄마를 부르는거야. 엄마가, 그리고 아빠가 한꺼번에 달려가 아들을 얼싸안았지.
할아버지가 어느새 곁에 서 계셨어.
"글세, 이녀석이 외가집에 갔다가, 장마 통에 개울물이 불어나자 다리가 떠내려가서 이제야 돌아왔다지 뭐냐. 어서 그만들 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자꾸나. 웬지 요즘은 음식을 먹어도 금세 배가 고프단 말야, 허허허."
할아버지가 웃으시며 말씀하셨어.
할아버지가 앞장 서시고, 그 뒤에 아빠와 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언덕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지. 엄마와 아빠는 산 언덕 좁은 길을 걸으며 몇 번인가 쓰러지실 뻔했어. 아이 손을 놓치지 않으려다가 몇 번인가 헛 발을 디디며 눈물 젖은 눈으로 웃으시곤 했지.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사랑방 툇마루에 나앉아 시조를 읊으시고, 엄마는 부엌에서 점심밥을 지으셨어. 그런데 아빠가 몰래 괭이를 들고 뒤꼍으로 가시는거야. 그리고 앵두나무 밑 작은 봉분을 파헤치고 계셨어.
"아빠 뭘 해? "
아이가 물었어.
아이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지. 아빠는 정신없이 땅을 파헤쳤어. 거기엔 인삼 뿌리 삶은 찌꺼기가 한 움큼 들어 있을 뿐이었지.
아빠가 그것을, 한 움큼의 인삼 찌꺼기를 두 손에 담아 들여다 보시다가, 그것을 가슴에 가져다 문대다가, 그 가슴에 아이를 싸안아 부둥켜 안았어.
그게 바로 나야.
엄마가 우리 곁에 서 계셨어. 여전히 할아버지의 청아한 목소리, 시조 읊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어. 뒷산 숲 속에서 뻐꾸기가 울고 있었지.
경일아.
이젠 정말 더 못 쓰겠어. 어깻 죽지가 빠지는 것 같애. 우리 집 가족 소개를 한다고 해놓고 겨우 내 이야기를 시작하다 말았네?
내가 맨 처음에 친구가 되자고 말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절로 되는거지. 오늘은 이만, 쉬었다가 다시 쓸게. 그럼, 경일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