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규 연재동화 (2002. 2)

약수터 가는 길(4)



"경일아....."
아빠가 여행을 떠나시며 말씀하셨다.
"나 없는 동안에도 아침 등산 잊지 말아라."
"그럼요, 아빠."
경일이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녀석 뽐내기는...."
엄마가 웃으셨다.
"제가 지켜볼 테니까 염려 말고 다녀오세요."
"자, 그럼 다녀오리다."
아빠가 커다란 가방을 들고 현관을 나가셨다. 그 가방 속에는 카메라와 녹음기가 들어 있었다. 그 가방 속에는 공책과 볼펜이 들어 있었다. 그 가방 속에는 치약과 칫솔이 들어 있었다. 그 가방 속에는 또 속옷도 들어 있었다.
아빠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봄 가을 한 차례씩 여행을 떠나시곤 한다. 우리들이 방학 때 곤충 채집과 식물 채집을 하듯, 아빠는 봄 가을 한 차례씩 노래와 이야기를 채집하러 여러 지방을 여행하신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가에서 예쁜 돌멩이를 찾듯이, 아빠는 노인들을 만나 잊혀져가는 노래와 옛날이야기를 받아 적고 녹음하셨다. 때로는 장거리에서 약장사를 만나고, 때로는 산마을에서 밭매는 아주머니를 만나, 깨소금같이 고소한 옛날이야기와 어깨춤이 절로 나는 옛노래를 채집하셨다.
아빠가 이런 재미나는 이야기와 흥겨운 노래, 그리고 때로는 슬픈 이야기와 한숨 섞인 노래를 채집하는 동안 경일이는 솔직히 말해서 아빠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경일아, 산에 안 갈거니?"
아침마다 엄마가 깨우셨지만, 경일이는 그 때마다 이불 속으로 더욱 깊이 기어들고 있었다. 가을 운동회를 앞두고, 매일 계속되는 뜀박질로 팔다리가 쑤시고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고 있었다.
"경일아, 교회도 안 갈거니?"
주일 아침 엄마가 말씀하셨다.
"갈 거예요."
경일이가 대답했다. 팔다리가 쑤시고 아프다고 엄살을 부려, 아침 등산은 어떻게 그냥 넘길 수 있었지만, 엄마가 '산에 안 갈거니?' 하고 묻는 말과 '교회도 안 갈거니?' 하고 묻는 말은, 똑같은 내용으로 묻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경일이는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경일이는 '갈 거예요.' 로 대답한 것에는, '산에는 안 가도 교회는 가야지요.' 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경일이는 우리말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도'자 하나가 붙어서 꼼짝 못하게 된 경일이는 세수를 했다.
"이두 닦구."
엄마가 말씀하셨다. 경일이는 이를 닦았다.
"헌금 갖구 가야지."
엄마가 말씀하셨다. 경일이는 헌금을 챙겼다.
"성경책 갖구 가야지."
엄마가 말씀하셨다.
"성가책도 갖고 가요."
경일이가 말했다.
"저 녀석.... 차 조심하구."
엄마가 웃으셨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논다. 모래장난, 시소, 미끄럼틀에 매달려, 아이들이 가을 햇볕 아래서 논다. 햇볕이 눈부시다. 여름 햇볕과는 다르다. 실발같이 가늘다. 잠자리채를 들고 잔디밭을 뛰어 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시장을 지난다. 햇과일들을 노점에 늘어놓고 판다. 사과, 배, 감 그리고 고구마를 연탄 화로에 찌고 있다. 어느 새 참외, 수박, 토마토가 자취를 감추었다. 연탄 화로 위에서 옥수수도 자취를 감추었다. 계절이 바뀌는 걸 보면 참 이상도 하지.....
"경일아...."
그 때 누군가가 부르는 것 같았다.
"....?"
아무도 없다. 분명히 '경일아' 하고 불렀는데 이상하다. 다시 걷는다.
"....경일아, 나야."
"아, 민영이."
바로 곁에 서 있었다.
"뭘 그렇게 둘러보고 있니?"
민영이가 말했다.
"난 또 누구라구."
"멀리서 찾으니까 안 보이지. 바로 등 뒤에 있는데...."
민영이가 생글생글 웃었다.
".....이것 먹어."
민영이가 사과 한 알을 내밀었다. 사과를 받았다.
"교회 가는구나. 난 시장에 나왔어. 과일 좀 사려구....."
민영이가 말했다. 꼭 아주머니 말투다. 경일이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늦을라 어서 가 봐."
민영이가 말했다. 경일이는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돌아섰다. 사과 한 알을 들고, 교회로 왔다. 선생님이 성경을 읽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제물을 사를 장작을 쪼개 가지고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곳으로 서들러 떠났다. 떠난 지 사흘만에 아브라함은 그 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거라.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저리로 가서 예배 드리고 오겠다." 하고 나서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씨와 칼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버지!"
"얘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놓은 다음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수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수양을 잡아 아들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곳을 '야훼 이레' 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고들 한다......
"어린이 여러분, 오늘은 '야훼 이레' 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어요."
선생님께서 성경 읽기를 마치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