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규 연재동화 (2002. 4)

약수터 가는 길(6)



경일아, 안녕. (두 번째 편지도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붓글씨였다. 창호지에 쓴, 가는 붓글씨였다. 군데군데 먹물이 묻어 있었다.)
…지금은 밤이야. 깊은 가을밤이야. 이야기를 듣고 있어. 네가 사는 별나라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의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 천군사를 오르는 길옆에 노인정이 있지? 거기 놓인 의자들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이제 가을이 완연해. 저 나뭇잎이 지는 걸 보렴. 지난 한여름동안, 이 동네 갈 곳 없는 노인들이 와서 낮잠도 자고, 얘기도 했지… 이제 겨울이 와 봐. 온 산천에 눈이 쌓이면 별 볼일 없이 나둥구러져, 버림받은 신세, 한탄해야 소용도 없구…”
안락 의자가 말했어.
“당신이 보는 대로 내가 어디 버릴 때가 됐어? 아직 몇 년 더 깔고 앉을 수 있는 것을, 돈 좀 벌었다구, 새 가구를 들여놓으면서 내버렸다구. 하기야, 여기 와 자리잡고 타박받는 이 동네 노인네들 앉아 쉬게 됐지만서두.”
철제 의자가 말했어.
“나는 다방에 있다가 쫓겨났지. 그 젊으나 젊은것들, 밤낮 없이 붙어 앉아 노닥거리는 것이 눈꼴시어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잘 됐지만서두, 왠지 아침저녁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부니 허리 어깨가 시리구 결리는구먼….”
초록색 천을 씌운 나무 의자가 말했어.
“어이구, 말 말게. 나는 말이야. 그 나이트 클럽엔가 디스코 클럽엔가 있다가 쫓겨났는데 말이지, 날만 저물면 몰려와 마시고 토하고, 소리 지르고 비틀거리며 쿵쾅쿵쾅거리는 통에 귀가 멍멍하고 정신이 없다가, 너무 조용해선지, 그래도 옛날 생각이 난다니까….”
나무 의자가 말했어.

“난 말일세, 음악 감상실에 있다가 쫓겨났는데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요새 사람들 즐기는 게 그게 어디 음악인가? 발광이지, 그래 맞았어, 발광이야. 미쳤단 말야.”
또 다른 의자가 말했어.
“말 말게. 우리 주인은 갈 곳이 없어. 내가 이렇게 내버려졌는데도 여전히 우리 주인은 이 곳으로 날 찾아온다니까. 요새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새 것만 좋아하는지…자기를 낳아 키워준 부모마저 헌 것이라구 버리는 게 아니고 뭔가. 그러니까 우리 주인이 찾아오는 곳이 이 노인정이 아니겠나? 이리저리 비켜 앉다가, 병들면 병원으로 옮겨져 딱딱한 쇠침대 위에서 숨지고, 숨지면 자동차에 실려가서 한줌 재가 되고 마는 것, 참으로 현대적이지….”
안락의자가 말했어.
“남의 말하지 말게. 우리 신세는 뭐 다른가? 낼모레면 쓰레기차에 실려가 땔나무가 되고 말 것을….”
또 다른 의자가 한숨을 푹 쉬었어.

내가 보기에도 그래. 천군사를 오르는 길 옆, 공터에 놓여 있는 의자들은 아직도 쓸 만한 것들이야. 어쩌면 그런 의자들을 모두 내다 버렸는지 몰라. 하기야 그런 의자들을 내다 버렸기 때문에 갈 곳 없는 노인들이 찾아와 쉴 수도 있지만 말이야.
버림받은 의자에 모여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이 불쌍하단 말이야. 어쩌면 그렇게 쉽게 내팽개칠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경일아, 그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어? 자기 손으로 애써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
하나의 의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가 필요하구 못이 필요하구 톱과 망치 같은 연장이 필요해. 오랜 시간 햇빛과 비를 맞으며, 땅 깊이 뿌리박고 자란 나무를 베어다가 톱으로 썰구 못을 박아 하나의 나무 의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힘이 들고 정성이 필요해. 못을 박다가 손가락을 때릴 수도 있어. 톱질을 하다가 다칠 수도 있어. 상처를 입으면 피도 흐르겠지. 다친 손가락을 헝겊으로 싸매고 다시 일을 계속해야 돼. 그러는 사이 의자를 만드는 사람의 노력과 정성이 그 의자에 스며드는거야. 목수가 아닌 서툰 솜씨라면 더더욱 노력과 정성이 많이 필요하겠지. 그래서 완성된 하나의 의자라면 별로 볼품은 없을지 몰라도 쉽게 내버릴 수는 없게 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