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순 - 성서 난해구 해설 (2001. 10)

보복해요 말아요?

민영진 목사
(대한성서공회부총무)


          

질문

민영진 목사님께,

지난 9월, 인류는 역사상 최대의 테러를 경험하였습니다. 보복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보복은 악순환의 고리일 뿐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마침, 시편을 137편을 보니, "여자 같은 멸망 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시 137:8-9)라는 끔찍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또 원수를 갚지 말라고도 하셨지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뉴욕에서 박요셉 올림>


대답

박요셉 님께,

뉴욕에 살면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지금쯤은 그 충격에서 벗어나셨기를 바랍니다만,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귀하께서 지적하신 시편 137편은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을 바라며 시온을 그리워하는 "유랑민의 발라드"입니다. 무너진 예루살렘과 사로잡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한과 탄식, 혹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자기들을 포로로 잡아 온 바빌로니아에 대하여 복수를 비는 기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의 여러 강변 포로 수용소에서 국치민욕(國恥民辱)에 치를 떨면서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그 날을 회상하면서 이스라엘은 복수의 날과 귀환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시를 탄원의식(歎願儀式)과 관련시켜서 설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탄원의식에서는 비탄의 날을 회고하는 이야기가 반복되고, 국치민욕과 포로생활을 슬퍼하는 노래가 불려지고 원수를 갚아주기를 비는 보복의 기원이 받쳐집니다. 이러한 포로들의 탄원의식은 바빌로니아 당국에서 볼 때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사였습니다.

시편 137편에는 그러한 탄원의식이 금지되었던 배경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바빌로니아 정부 당국은 이스라엘 포로들이 슬픈 노래를 부르는 탄원의식을 그치고, 기쁜 노래 곧 시온의 노래를 부르는 축제의 행사를 실시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러한 축제를 강요당할 때마다 오히려 악기를 나무에 걸어두고 노래를 부르지 않는 백성이 되어 버리곤 합니다.

아마도 탄원의식 때 불렀던 노래가 바로 시편 137편 1절과 5-6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는 시편 137편 1절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울었다"를 반복하여 부르는 "알 나하로트 바벨(바빌론 강가에서 By the Rivers of Babylon)"라는 노래이고, 다른 하나는 시편 137편 5-6절을 중심 내용으로 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을 읊은 "임 에슈카헥 (내가 너를 잊는다면 If I Forget Thee)"입니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라는 구절에는 받은 대로 갚고 싶어하는 민족적 울분과 적개심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가해자에게는,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는(출 21:23- 25; 레 24:20; 신 19:21) 것이 바로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 혹은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입니다. 이 법은 잔인한 법이 아니라, 오히려 공정한 보복 원칙으로서, 얼마든지 더 지나치게 보복할 수 있는 원시적인 사적 보복을 제한하는 진일보된 법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다짐한 보복은, 상처(傷處)를 입은 경우에는 살상(殺傷)으로 보복한다는 것입니다. 숫자로 표시하여 일흔일곱 갑절로 보복한다고 선언합니다(창 4:23-24).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 같은 잔인한 보복을 비는 이 시에서 오늘의 독자들은 혼란을 느낍니다. 예수께서 이런 복수를 금하시고 대신에 사랑의 법칙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동해복수법을 지적하시면서 보복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마 5:38-42; 눅 6:29-30). 한없는 자비(慈悲)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복수를 하고 싶으면, 자기 책임 하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말하듯이 계속적인 테러는 복수의 악순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테러는 범죄 예방의 차원에서 막음으로써 억제할 것이지, 보복으로 발본색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미국국민에게는 탄원의식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복수심을 고취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로 멍든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의식입니다. 오히려 피해자들인 자기들을 더욱 황폐하게 하는 원수(怨讐)를 향한 타오르는 적개심(敵愾心)을 서서히 없애는 의식입니다. 자기들을 저주(咀呪)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축복(祝福)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모욕(侮辱)한 그 가해자들을 위해 기도(祈禱)할 수 있는 경지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적개심은 여당과 야당 사이에도 있습니다. 보수파와 진보파 사이에도 있습니다. 지역갈등, 남녀갈등, 종교갈등, 고부갈등도 다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복수를 포기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가능(可能)의 윤리라기보다는 당위(當爲)의 윤리입니다. 비록 못 미쳐도, 당위라고 하는 가치 앞에서는 보복은 정당성을 상실합니다.

시편 137편을 읽는 독자에게는 바빌론 포로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원한을 망각하게 할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상기하도록 촉구하는 이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적개심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잔악함을 인식하기 위한 것입니다. 본문을 노래로 부르거나 위에 인용된 탄원의식의 노래들을 함께 부르면서 포로들의 경험에 동참하거나 경험된 아픈 역사를 진술할 언어와 음률에 익숙하게 합니다. 탄원의식은 적개심의 축적으로서가 아니라, 원수를 갚고 용서하는 영적 체험으로 승화됩니다.

승화된 단계가 바로 우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27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35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표준새번역} 눅 6:27-35)

민영진 드림

민영진목사
편집위원, 대한성서공회부총무, 감신대교수(구약신학) 및 대한성서공회 번역실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