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9장 12절)
사형제도의 존폐문제를 예로 들어
성서를 어떤 이념이나 제도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할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서 본문 을 직접 인용한다. 교리를 만들 때도 성서의 본문이 그 근거 구절로 인용된다. 기독교인의 윤리를 말할 때에도 성서에서 그 근거 구절이 인용되곤 한다. 성서에 근거하여 어떤 제도나 법규를 만들 때에도 성서가 인용된다. 그래서 그 때마다 "성서에 의하면"이라던가, "성서가 말하기를"이라던가, "성서에 입각하면"이라는 표현을 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떤 주 장의 증거 구절 곧 증빙구로 성서를 인용할 때, 오히려 가장 비성서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도 있다는 점에 착안할 필요가 있다. 성서 본문에 대한 아전인수(我田引水)격 인용이나 견강 부회(牽强附會)와 같은 인용은 오히려 성서의 정신을 파괴하는, 성서에 대한 오용일 수가 있 다. 성서의 정신을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나 사회적 제도에 적용하려고 할 때에는 성서 본문 의 인용만이 능사가 아니다. 성서 안의 다양한 사례 중에서 어느 한 입장을 택하기 위해서 는 우리 자신의 윤리적 결단이 함께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 사형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성서는 사 형제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사형제도를 존속해야 할 것인지, 폐지해야 할 것인지를, 성서에다가 대고 물어 본다면 성서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해 오는가? 사형제도 존치(存置)의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성서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지지해주는 많 은 구절들을 쉽게 찾는다. 그런데, 동시에, 사형제도 폐지론자도 성서에서 그 근거 구절을 찾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사형제도 존치를 주장하는 이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 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창 9:6) 하는 것 을 위시하여, 특히 구약성서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목을 빈번히 언급하고 있는 여러 곳의 본 문을 찾는다. 오늘의 법에서는 사형에까지 해당되지 아니하는 죄도 구약에서는 사형을 시키 도록 지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신성한 금지 구역의 침입자(출 19:12-13), 합법적이 아닌 성 관계를 맺은 자(레 19:20), 살인자(출 21:12), 부모를 구타한 자(출 21:15), 유괴범(출 21:16), 짐승과 성관계를 한자(출 22:19),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출 31:14-15; 35:2), 동성연애자 (레 20:13), 접신(接神)하는 자(레 20:27),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자(신 13:5), 제사장이나 재 판관 같은 공무집행자를 모독하는 자(신 17:12) 등을 모두 사형으로 다스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난 사형에 해당되는 죄목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여기에 반하여, 사형제도 폐지의 성서적 근거를 찾는 이들은 먼저 구약에 언급된 사형 에 해당되는 죄목들의 비현실성을 지적한다. 즉, 유대교나 기독교가 문자 그대로 구약의 모 든 법을 다 지키는 것도 아니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구약에 나와 있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목 가운데 여전히 살아 있는 죄목은, 그것이 구약이라는 경 전 속에 들어 있어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시대와 장소와 문화를 초월하여 널리 인정을 받 는 법이기 때문에, 아직도 살아 있는 법으로 여겨질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성서의 규정은 법으로서의 효력을 갖기보다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 규범으로만 남아 있고, 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드리는 신도들에게도 나라의 법이 성서 안의 법보다 더 실질적인 권위를 가지 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형제도의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성서를 인용한다는 것이 별로 큰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논증한다. 달리 말하면, 구약의 법 중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법을 다 긍정하지 않고 오직 살인의 경우만을 사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주관적인 선택, 곧 법 적용의 일관성 결여가 구약 인용의 설득력을 약화시킨다. 이러 한 관찰이 바로 기독교 안에서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의 출발점이다. 기독교가 구약의 법, 특히 사형에 해당하는 법, 혹은 범위를 줄여서 살인자를 사형해야 한다는 법을 그대로 따른다고 할 때, 그것이 용서와 사랑을 본질로 하는 기독교를 원수갚음을 합법화하는 유대 교와는 아무런 차별성이 없는 보복의 종교로 만들고 만다는 딜레마를 관찰한다. 더 나아가, 죄악 중에서도 큰 죄로 평가되는 살인을 범한 죄인을 사형으로 처형해야 한다고 할 때 그리 스도의 속죄(贖罪)의 은총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난처함이 있다는 점에 착안한다. 그리스 도의 죽음이 살인범들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가 하는 물음이다. 살인범마다 사형에 처해 야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의 한계를 실제로 인정하는 것이 되버린다. 구태여 여기까지 오지 않고도, 사형제도 존치의 입장이 위에 인용된 창세기 9장 6절을 인용하면, 사형제도 폐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동해복수 법(同害復讐法)에 입각하여 죽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은 그에게 표를 찍어 주어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 못하게 하셨다는 창세기 4장 1-16절을 인용한 다. 서로 대립된 견해들이 성서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절을 찾아낸다는 것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좋은 해결책이 못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안에서 사형제도 문 제를 놓고서, 이것을 폐지해야 할 것인지 그대로 존치해야 할 것인지 하는 논의가 활발해 질 때, 교회는 어느 한 입장을 안이하게 취하기보다는 이 문제를 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심 사숙고하면서 고민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한 편으로는 사형제도를 존치하면서 실행을 유 보해 보는 방법도 있을 수 있을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범죄 문제 자체를, 왜 그러한 범 죄가 자행되며, 그러한 범법자들이 속한 사회적 계층이나 집단의 성격이 어떠하며, 왜 그러 한 성격집단이 형성되는지 폭넓게 고찰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범죄의 복합적인 요인이 발생하는 사회에서 범죄를 예방하고 치유하는 일에 교회가 어떤 몫을 담당해야 할지 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상이한 두 입장 중에서 어느 한 입장을 서둘러 택하여 그것을 고수하느라고 자기에게 맞는 성서 구절들이나 끌어들이고, 보수 비보수 간에 쓸모 없는 공 방전을 벌리는 것보다 더 말씀을 해석하고 순종하는 교회의 자세일 것이다. 성서 안에는 서 로 다른 두 입장이 다 지지를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다 허용하셨다 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입장을 취할 것인지는, 민족적 양식의 성숙을 감지하 면서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며, 택일을 하든 양자를 다 시험적으로 수용하든 그것은 범죄 문제에 대처하는 교회의 윤리적 신앙적 결단의 문제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런 데, 이것이 어디 비단 사형제도의 존폐 여부 문제의 경우만이겠는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