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무어 / 김영운 옮김
그 다음에 우리는 나르시시즘을 문제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기회로 볼 수 있다. 즉, 성격 결함으
로가 아니라 "타자성"(他者性)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영혼으로 볼 수 있다. 나르시시즘은 자아
(ego)에 대한 단순한 초점으로 보기는 좀 약한 반면에 자아(self)의 역설적 의미에 대한 필요를
천명하는 것으로 보기, 즉 자아(ego)와 비자아(non-ego) 양쪽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쪽
이 더 강하다.
내 생각에 나르시시즘에 대한 이런 접근이 암시하는 것은 자아와 심지어 이기주의에 대하여 부 정적인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자아는 사랑 받고, 주의가 필요하고 드러남을 원한다. 그것이 자아의 본성의 일부분이다. 정신(psyche)이 겉으로 눈에 띄게 나타나는 모든 모습은 밥맛없어 보 이거나 심지어는 난폭하게 보이는 것을 필요로 한다. 통속적인 심리학은 어린이의 모습을 낭만적 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워크샵에 참석하여 "내면에 있는 어린이를 발견" 하려 하지 만, 실제로 그들은 울고, 뭔가 필요하고, 토라지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쏟치고, 오줌싸는 어린 이를 일깨우러 이런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역시 어린이의 특성이다. 자 아, 즉 "나"라고 쉽사리 이름 붙이는 전체 구성이 호소하는 듯한 필요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실 상 여러 얼굴을 지닌 사람이란 사실, 즉 영혼의 여러 모습을 인정한다면, 내 생각에는 우리가 다 른 어떤 존재보다 더 "나"라는 인생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이 "나"에게 지나친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신 화에서 교훈을 얻는다면, 나르시시즘은 불행한 상황으로서, 그 속에서 우리 내면에 연못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하며, 그 연못에서 또다른 자아인 "나"에 대한 더 심층적 의미가 우리의 주의와 애착을 끌기 위하여 나타날 수도 있다. 나르시시스트 적인 사람은 자신의 본성이 얼마나 심오하 고 흥미로운가를 단순히 모를 뿐이다. 나르시시즘에 갇혀서 그는 인생의 책임이라는 짐의 무게를 온통 자신의 어깨에 메고 다니도록 정죄되었다. 그러나 일단 "나"라는 인성을 에워싸고 있는 다른 모습(인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면, 인생의 어떤 일은 그들이 하게 할 수 있다. 나르시 시즘은 마음대로 즐기는 쾌락처럼 보일지는 모르나, 만족의 얼굴 뒤에는 억압적인 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