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4:13-35, 요 15:6-11)
하태영 (목사/삼일교회)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 『좀머 씨 이야기』가 있다. 한창 하늘을 나르고 싶은 충동으로 가 득한 어린 시절의 <나>라고 하는 소년의 눈에 비친, 호수 건너편(죽음)에 산다는 좀머 씨를 통해 인생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좀머 씨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사는 지도 모른다. <나>의 눈 에 비친 좀머 씨가 하는 일이란 언제나 부지런히 걷고 있다는 것뿐이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 어지고 있는지 관심도 없다. 분명히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것 같기도 한데 무엇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면, 그는 으레 "그러니 제발 나를 그냥 놔두시오"라고 퉁명스럽게 응수할 뿐이다.
어느 날 <나>는 좀머 씨가 나무 아래 앉아 배낭에서 빵 한 조각을 꺼내 들고 파르르 떨면서 입안에 털어 넣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또 변함없이 걷는 것 이었다. 그 때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는다. 좀머 씨가 그토록 열심히 하는 일이란 고작 빵 한조각을 입에 털어 넣는 것이라니.
몇 년이 지난 뒤, 어느 날 해 거름 녘에 좀머 씨가 호수를 향해 걸어 들어가더니 그 뒤로는 영영 보이지 않게 된다. 좀머 씨가 사라진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좀머 씨가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느니, 여행을 떠났다느니, 산에서 길을 잃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다느니, 밀폐 공 포증 때문에 보다 넓은 나라로 이주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무성하게 하지만 생각이 호수에까지 미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소중하다. 나무에 기어오르는 것도 소중하고, 호수 건너 마을 에 사는 여학생과 만나기로 한 약속도 소중하다. 그것들은 언제나 내 머리 속을 꽉 채우고 있다. <나>는 어른들처럼 내게 처한 삶의 문제들을 유식한 말로 표현 할 수는 없지만, 좀머 씨 역시 내게 소중한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어른들이란 도대체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열심히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일만을 열심히, 반복해서 한다. <나>같은 어린눈으로 볼 때 는 과연 무엇인가 중대한 것을 찾기 위해 그토록 변함없이 걷고 또 걷는 것 같았으나, 알고 보니 고작 하는 일이란 파르르 떨면서 목구멍에 빵 한 조각 밀어 넣는 일이다. 그리고 이제 어른이 된 <나>도 내가 알고 있는 좀머 씨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
『좀머 씨 이야기』가 다소 길게 늘어진 것 같다. 부연하자면 작가는 좀머 씨와 그리고 좀머 씨를 바라본 <나>의 눈을 통해 어른들의 세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어른들은 기막히게 열심히 산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열심히 죽음을 사는 게 아닐는지? 죽음을 산다기 보다, 죽음으 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풍우가 몰아 치거나, 화창한 봄날 이 되어 꽃이 피고 나비들이 춤을 추어도 관계없이 그냥 열심히 죽음의 호수 속으로 들어가고 있 다. 어른들은 그것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는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자 예수의 제자들은 심각한 좌절에 빠진다. 누가 복음은 실의에 빠진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라는 동네를 향해 내려가는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저들의 어깨는 축 쳐져있고, 마음은 수심으로 가득하다. 예수에게 걸었던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 나고, 앞으로 먹고 살 일도 걱정이지만, 엄습해 올 박해를 어떻게 피할 것인지, 생각만 하여도 아득하였 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풀리지 않는 십자가 사건이 자꾸만 떠올라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게다가 무덤에서 예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말이 떠돌고, 부활한 주님을 만났다는 이해할 수 없는 소문 까지 들리고 있으니 여간 혼란스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이 낙심한 제자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께서 동행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 데도 "저희의 눈이 가려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였다"(눅 24:16)는 것이다. 그리고 날이 저물 어 저들이 함께 떡을 떼면서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았다"(눅 24:31)고 한다. 그 사이에 무 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처음에 이들은 자기 생각에 골몰하느라 함께 걷는 이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최근에 일어날 일'을 두고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도 동행하는 이는 여전히 '낯선 사람' 이었을 뿐이다. 날이 저물어 유숙할 처소로 들어갈 즈음해서 이들은 비로소 어둔 밤길을 혼자 가 야 하는 '낯선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이때 지금까지 '낯선 사람'은 하루 밤만이라도 위험 을 함께 나눠야 할 '동료'로 바뀐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를 강권하여 숙소로 데리고 들어가 함께 떡을 나눴고, 바로 그때 저들의 눈이 밝아져서 지금까지 함께 걸었던 나그네가 부활하신 주님이 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의에 빠졌던 제자들이 '부활 체험'을 하는 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말하면서 부활의 영체(靈體)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마지막 날' 그 모든 신비가 드러나리라는 희망을 안고 있을 뿐, 부활의 영체를 알 길이 없다. 중요한 것은 '부활 체험'이다. 부활의 영체는 알 수 없음에도 '부활 체험'은 지금 우 리 가운데서 현존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부활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인가? '낯선 사 람'을 '동료'로 대할 때 부활은 현존으로 나타난다. 나그네와 같은 <너>에 대해서 진정으로 관심 을 가질 때,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너>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살아날 때 주님의 부활 은 현존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여기서 부활과 십자가는 일치한다. 십자가는 <너>에 대한 사 랑의 극치이다. 때문에 십자가는 단순히 이타적인 사랑의 상징이 아니다. 십자가는 <너>안에서 죽은 <나>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바울 식으로 말하면 십자가는 원수 관계인 <너>에 대한 사 랑임과 동시에 <너> 안에서 원수 된 <나>와의 화목인 것이다. (롬 5:8-10). 부활의 영체는 알 수 없음에도 십자가 사랑을 통해 '부활 체험'은 지금도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나>만을 생각하느라 <너>를 잊고 산다. <나>만 살기 위해서 <너> 를 부정하고, <너>를 원수로 여기며 산다. 끊임없이 <너>를 죽이며 산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너>만을 잊고, <너>만을 죽이며 사는 게 아니다. 바로 <너>안에 있는 <나>를 잊고, <나>를 원수로 여기며, <나>를 죽이며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나>는 온전한 나로서 사는 게 아니 다.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나>안에는 도무지 <너>가 없으며, 결과적으로 <너>안에 마 땅히 살아 있어야 할 <나>없이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너>안에 있는 <나>를 남이 아 닌 내가 죽이고 있다. <나>를 죽이는 원수는 <너>가 아니라 바로<나>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자. 내 마음에 <너>가 없는 데, 어떻게 타인인 <너>안에 <나>가 살아 있 겠는가! 우리는 이렇게 자기 환상에 빠져서 자기를 죽이고 있다. <나>의 눈에 비친 좀머 씨가 그랬고, 좀머 씨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이 그랬으며,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그랬다. 모두 가 <나>밖에는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그러던 저들이 나그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자기들이 머 물 숙소에 데리고 들어가서 함께 떡을 떼면서 비로소 지금까지 '낯선 그'가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보게 된 것이다.
<너>에 대한 관심은 <너>안에 있는 <나>를 발견함이요, <너>안에서 죽은 <나>를 살리는 것이다. 부활생명은 <너>와<나>의 관계 속에서 체험되기도 하고, 부정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고 하였을 것이다.
25 물 같은 성령(눅12:35-48)
26 고난으로 드리는 봉사(마20:17-28, 엡4:11-12)
27 제멋대로 폭발하는 생명에너지(골2:1-3)
28 부활체험 -<너>안에서 죽은 <나>의 소생 (눅 24:13-35, 요 15: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