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띄우는 말씀 (2000. 12)

"하나님께서 백성을 꾸짖으시다"

김영운 목사
(발행인 / 공동체성서연구원장)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자식이라고 키웠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을 깨닫지 못하는 구나."
(이사야 1:3, 표준새번역)


성탄절이 다가오면 늘 살피는 말씀이지만, 금년에는 이 말씀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깨닫지 못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가슴아프게 드러나고 있는 현실을 살기 때문입니다. 소나 나귀도 알아보는 "구유"를 하나님 의 백성이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탄생하면서 구유에 누이신 뜻을 가슴깊이 되짚어 봅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는 '도덕적 해이'란 말이 귀에 따갑도록 여기 저기서 들려 옵니다. 급기야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란 말이 외래어 대열에 끼여드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사실은 영어를 웬만큼 하는 사람들에게도 '해저드'란 말은 그리 익숙한 것이 아닌 데도 신문 지상에 느닷없이 쓰이는 것을 보면서 내심 놀랍기도 한고 서글프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회 와 교회에 마저 만연된 도덕적 해이를 통렬하게 지적하자니 진부한 표현이 된 듯 싶어서 그 것을 피하여 좀 더 자극적인 말을 찾다 보니 그리 된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어쨌든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모습이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목도하는 우리들로서는 피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해저드'는 위험, 모험 또는 우연을 뜻합니다. 더욱이 '모럴 해 저드'는 보험 용어로 쓰일 때, "부주의나 고의로 인하여 인격적 요소에 기인한 보험자 측의 위험"을 뜻합니다. 결국 사회에 만연된 도덕적 해이가 이 사회를 망하게 하는 도덕적 위험 이 된다는 뜻에서 '모럴 해저드'는 우리의 관심과 주의를 집중시킬 만 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과거에 자랑으로 여겼던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의 모습은 사라 지고, 외국인들마저 곧잘 말하는 '동방무례지국'(東方無禮之國)이 되어버린 모양입니다. 전 통적 가치와 윤리는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그것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혁신적) 가치관이나 윤리는 세우지 못한 탓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배제한 자본주의를 끌어 들인 나머지 천민 자본주의에 사로잡힌 꼴이 되었습니다.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노골적으로 '돈이 최고' 라는 식의 사고와 언행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물질의 넉넉함 만 쫓다가 영혼을 잃어버리고, 영혼의 메마름조차 느끼지도 못하고 까맣게 잊어버린 채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이 너무 길었나 봅니다. 공인의 복무자세나 정신도 흔들 리고 병든지 오랩니다. 종교인의 영성과 윤리마저 '맘몬이즘'(황금만능주의)에 깊이 빠져 버 린 형국입니다. 사회에 만연한 물신주의와 배금사상에다 극심한 이기주의가 결합되니까 사 회 구석구석에서 악취가 납니다. 이것이 결국은 교회마저 같은 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종교사회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어느 특정 종교인구가 전체 인구의 4분의 1만 되어도 그 종교의 윤리와 가치관이 그 사회를 지배하거나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오늘 기독 교 인구가 절대적 인구의 4분의 1을 넘어섰는데도 기독교적 윤리나 성서적 가치관이 이 사 회에 영향을 크게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병리현상이 교회를 뒤덮을 정도가 되었다면, 이 는 분명코, 하나님을 하나님의 백성이 모르고 있는 터입니다.

예배당에 가면 참된 예배보다는 헌금을 강조하다 못해 강요하다시피 합니다. 교단 총회 에 가면 이슈나 비젼은 간 데 없고 금권 선거판 만 벌어지는 듯 합니다. 이제는 더 늦기 전 에 하나님의 백성이 뼈를 깎는 아픔으로 '도덕적 해이'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며 회개해야 합 니다. 2000년 전에 예수가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보여던 타락이 오늘도 되풀이되어 서, 그것이 예수 오심의 이유가 되어서야 어쩌겠습니까?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재발 견하면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고, 깨닫는 계절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자 기 백성을 꾸짖으시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회개와 결단으로 새 세상을 가꾸어 나가야 하 겠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소자' 즉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소외당하고 억압당하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뜻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의가 구현 된다면, 그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기를 펴고 편안하게 의좋게 사는 세상이 되 는 법입니다. 우리를 꾸짖으시면서도, 예수를 보내시어 구유에 누이신 뜻을 가슴 깊이 끌어 안는 계절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