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띄우는 말씀 (2001. 3)

국민적 교양의 수준을 높입시다.

김영운 목사
(발행인 / 공동체성서연구원장)


       

봄을 기다리던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던 겨울이 지나갔습니다. 유별나게 눈도 많 았고, 삼한사온이 아니라 삼한사한을 빈번하게 겪도록 시베리아의 차가운 고기압이 세기도 했지만, 지난 겨울이 그토록 추웠던 것은 날씨 탓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 저기서 불거져 나오는 부정 부패와 비리, 그리고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접할 때마다 그것은 순전히 인재(人災)라는 생각들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위기라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그런데, 이 위기의 실상은 바로 지도력의 위기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 각됩니다.

지난 날 서울의 봄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꽁꽁 얼어붙었던 시절에 탄식하던 한 지도자의 말씀이 상기됩니다. 내가 아는 선배들 가운데 누구보다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던 그분은 당시에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였습니다.
"우리 국민은 착하고 좋은데, 지도자들이 문제 야."
나는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혼잣말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런 지도자를 인정하 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그 국민의 몫이지 않겠습니까?"
철없이 그 어른 앞에서 다른 말을 못했지만 오늘까지 풀어지지 않는 응어리진 것이 있습니다. 독일의 위대한 교회 지도자 마 틴 니뮐러가
"나치 히틀러를 허용한 것은 독일 국민이 공범이었음을 인식하고 고백해야 한 다."
는 말속에 담긴 깊은 뜻을 내 속에 품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어떤 지도자라도 그 국민 가운데서 나오고, 그 국민이 허용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가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물론 지도력의 의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도자들만의 과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국민이 위기 의식을 바르게 갖는 데서 일은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와 여러 가지로 사정은 다르지만 민중의 힘(People Power)이 부패한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필리핀의 경험 같은 것이 말해 주는 진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내부로 눈을 돌리고 보면, 사정은 딴판입 니다. 한 마디로 지도자들이 국민을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비단, 정치, 사회, 심지어 종교도 결코 예외는 아닙니다.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기 전에는 국민을 두려워하 지 않고, 민중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모르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국민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질주의에 깊이 빠져서 돈 버는 일에만 열중하고 민주주의와 정의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 문입니다. 총칼로 정권을 잡았던 이들은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 의식과 국민의 민주주 의 회복에 대한 열망 때문에, 비록 총칼의 힘을 의지하면서도 내심 국민을 두려워하였습니 다.
반면에, 이른바 민주회복을 위하여 투쟁한 덕분에 정권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오 히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오만과 편견, 아 니면 오해가 가능한 것도 따지고 보면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민심이 천심이 란 말을 선거 때마다 하면서 국민을 두려워하는 듯 하다가도 선거철이 지나기가 무섭게 유 권자로서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정치인들 앞에서 왜소해지고 무기력해지는 국민을 왜 두려워하겠습니까?

이제 더 늦기 전에 길은 하나 밖에 없어 보입니다. 새 봄의 기운을 살려서 국민적 교양 의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법을 존중하고 질서를 지키고, 잃어버린 상식 (common sense) 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3.1정신을 되살려 온 국민이 분발해야 합니다. 선거철이 아직 은 멀었지만 지금부터 온 국민이 떨쳐 일어나 선거 때에 어떤 지도자를 선택할 것인지를 미 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부도덕하거나 오만 방자한 지도자들이 설 자리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한 길이 있을 뿐 입니다. 우리 국민은 착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세계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내보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 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의연하고 올곧은 자세를 지도자들에게 보여주는 길 뿐 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4.19의거와 5.18항쟁도 3.1정신의 계승이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3.1정신을 되살려 국민적 교양의 수준을 높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