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띄우는 말씀 (2001. 7)

가난의 영성

김영운 목사
(발행인 / 공동체성서연구원장)


       

어느 날 초여름 오후에 복더위 같은 날씨를 이기며 기독교텔레비전방송의 밀레니엄 기획 특강 '자기 발견의 길' 마지막 강의를 준비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기독교 사회단체의 젊은 일꾼들이 사회복지 사업을 전개하면서 가 난의 영성에 관하여 명상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자문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긴 설명은 들을 것도 없이 명상하려는 마음을 먹 은 것도 대견하지만, 특히 가난의 영성을 생각하였다는 것이 정말 신선 한 충격이었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 뜨거운 것이 치솟는 감 격이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사회복지 사업을 하면서 단순히 시혜 적인 자선 이나 베푸는 일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젊은이들의 의지가 갸륵한 것만 은 아닙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찾아 나서는 몸짓도 물론 고 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인간이 주창하고 실현하 고자 하는 사회정의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정의를 갈망하는 그들의 열린 가슴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가난의 영성을 추구하는데는 짧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동기가 있 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 인심이 가난을 외면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날 교회마저 가난을 죄악시하거나 가난한 이 들을 게으르다고 정죄하는 성향이 강한 것을 생각하고 보면, 그 옛날 아 모스나 스바냐 같은 선지자들이 불타는 가슴으로 끌어안고 살았던 '아나 윔의 영성'이 우리의 젊은 일꾼들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낄 때, 어찌 떨리는 가슴으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난의 문제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곱은 문제로 국한 되지 않습니다. 신자들 개개인은 물론이요 교회와 사회가 제도적으로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태도가 어떠냐하는 것은 교회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경제발전과 고도성장을 강조하 는 나머지 가난을 직시하지 못하거나 가난한 이들의 어려움을 직면하지 못하면, 못하는 만큼 그 사회와 교회는 병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도 모자람이 있습니다. 가 난한 이들과 더불어 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는 눈을 감은 채 자선이나 베푸는 것 가지고는 '아나윔의 영성'을 가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동정심으로 봉사하는 일도 소홀히 해서 안되고,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도 게을리 해서는 안되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기에 덧붙여서 자기희생의 영성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아나윔'은 히브리어로 한마디로 똑 떨어지게 옮겨지지 않지만, 대체 로 '가난한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또는 '겸손한 사람들'이라 합니다. 아 나윔은 악하고 폭력적인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낮고 의존적인 사람들입 니다. 부자들과 대조하면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지체 높고 힘있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당당한 사람들에 비하여는 비천한 사람들, 부랑자나 노숙자들, 순진하게 고통을 당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아울러서 생각할 때 아나윔이란 말이 대표적으로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뜻을 교회가 외면하고 신 자들이 눈감아 버린다면, 예수의 가르침은 어디서 선포되며 증언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직시하고 직면 하였습니다.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예수는 들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예수는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동정심을 가지셨고 애끓는 마 음을 지니셨습니다. 오늘날 중산층을 지향하는 교회는 가난한 이들로부 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가난하고 병들고 무시당하는 민중은 예수에게 다가서고, 예수 또한 그들에게 다가서시는데, 교회의 설자리가 어딘지 다시 묻게 됩니다. 이런 물음 앞에서 가난의 영성을 찾으며 명상 하는 젊은 일꾼들은 오늘의 살아있는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