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띄우는 말씀 (2001. 9)

정직이 상책이다.

김영운 목사
(발행인 / 공동체성서연구원장)


       

거의 삼십 년 전에 '몸으로 읽는 성서'란 말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안팎에서 흥미로운 반응이 나왔습니다. 외국인들은 그 말을 영어로 직역하면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형편이어서 일반 신도들에게는 '성서가 살아나게 하라'는 뜻으로 'Let the Bible Live'라고 하였습니다. 신학자들에게는 'Somatization of the Bible'로 풀이하였습니다. 즉 '말씀의 화육'을 달리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그 뜻을 얼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속뜻을 알려는 생각은 없이 대개는 자신들이 '몸으로 읽는 성서'라고 바꾸든지, 아니면 그렇게 표현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못 마땅하다는 반응을 보이곤 하였습니다. 그 배경에는 '거룩한 경전'을 '거룩한 책'이라고 하여 성경을 격하시키는 것이 될까봐 염려하는 갸륵한 속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에 불 타오르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본디 경전이란 표준이요. 기준이요 잣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과 삶에 대한 '충분한 표준'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경전'으로 강조하는 한국교회의 다수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과연 그 표준에 맞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열 발짝 물러나서 생각할 때 아무도 온전하게 그 표준에 맞도록 살지는 못한다 하여도, 오늘처럼 한국교회의 윤리와 가치관이 문제되다 못해 이제는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는가 없는가를 말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더욱이 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목회자들이 정직과 신실이 문제로 지적되는 현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합니까? 희망이 없을 때 희망은 얘기되는 것이요, 거기서부터 희망은 찾아나서는 것이라는 말도 모를 바는 아닙니다.

물신주의와 이기주의와 무한경쟁에 내 몰리면서 냉소주의와 정치적 무관심 내지는 반감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잃어가는 것은 정해진 코스인 것 또한 모를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거룩한 책으로 또는 거룩한 경전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이른바 하나님의 백성이란 사람들이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살면서 '경전'을 높이 쳐들기만 하는데 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사회병리 현상을 극복하거나 치유하기 보다는 그 증상에 깊이 빠져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옛날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다."고 하던 엘리야 같은 선지자도 "이젠 나만 홀로 남았다."고 절규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사회기강이 문란해지고 정의가 간 데 없고, 민중이 '목자없는 양떼처럼 방황하는'상황이 되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는 모양입니다, 이를테면, 고관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이고, 재판관들은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우는 저녁 이리떼가 될 때, '예언자들은 거만하며 믿을 수 없는 자들이고, 제사장들은 성소나 더럽히며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 됩니다. 스바냐 3:3-4절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는다면 이런 표현은 필자가 감히 불경스럽게도 '하나님의 종들'을 저주하는 꼴이 될지 모릅니다.

이렇게 희망을 잃으면 사회나 교회 그 어디서도 이른바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벌이는 행사는 민중들 편에서 보면 '그들의 잔치'일 뿐입니다, 풀뿌리는 점점 더 소외되어 갈 뿐입니다. 사회 지도층에게 정직과 사실을 요청하는 것이 너무 까마득한 얘기가 되어 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에게 가장 요청되는 것이 '정직과 신실'이라는 사실 앞에서 어떻게 답할 것입니까? 이제 더 늦기 전에 지도자들은 민심을 바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그것은 바로 지도자들이 시민이나 회중이나 모든 민중이 답답해하고 가슴앓이 하는 것에 대하여 뜨거운 동정심, 함께 고난받는 심정을 갖는 것입니다. 사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민중과 '입장의 동일함'을 끌어안는 일을 정직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