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삶의 뜨락 (2000. 9)
물어보기 그리고 정성껏 듣기
홍보연
제가 일하는 상담소에서는 몇 달 전부터 홈페이지를 통한 온라인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전화상담이나 대면상 담을 할 때와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 상담소에서 주력하는 활동은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를 입은 교회여성 을 상담하고 지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여성상담소'라는 평이한 이름 때문인지 인생상담, 신앙상담 등 삶의 전반에 걸친 고민들도 많이 의뢰됩니다. 그런데 온라인 상담을 개설하고 보니 그 특성상 20대의 젊은 여성 내담자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은 주로 이성관계에서의 성문제입니다. 때때로 데이트 강간이나 스토킹, 혼 전임신과 같은 사례들은 상담자를 매우 안타깝게 합니다. 데이트 강간 경우는 서로 오랜 기간 사귀고 있는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더 많은 상처를 가져다줍니다.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이 발생하는 원인을 여러 가지로 들고 있지만 그 발생 원인 중 하나는 의사소통의 불일치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폭력을 간단히 정의하면 '동의되지 않은 모든 성적 관계나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의 를 했는지, 아닌지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면 파악될 수 있습니다.
연인이나 이성 친구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상황을 보면 충분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 다. 주로 남성이 성 관계를 요구하게 되면 젊은 여성은 성 의식의 혼돈상황에서 대답을 유보하게 되고, 때로는 자신 의 거부의사로 인해 관계가 깨질 것을 염려하여, 또는 상대방이 상처받을까봐 성관 계를 원치 않아도 단호히 'NO'라 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많은 경우 여성의 침묵이나 'NO'는 'YES'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한 내담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남자들은 자신이 사랑하고 아껴주어야 할 여자에게도 섹스를 요구하나요?' 계속되는 남자친구의 요구로 인해 이제는 사랑자체를 의심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의사가 존중받지 못하고 배려 받지 못한다는 것은 자존 심이 상하는 일일뿐 아니라 그것 자체가 폭력입니다. 성폭력을 하는 많은 경우 남성들은 상대방이 그 행위를 원하는 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감정이나 생각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묻지 않을 뿐 아니라 듣지도 않습니다. 수도 없이 'NO'라고 했건만 '너도 좋으면서 뭘 그러느냐'고 합니다.
저는 배려라는 말을 참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배려가 몸에 배어있다면 의사소통도 원활하게 될 것이고, 싸울 일 도 줄어들 것이고 폭력이나 범죄도 없어질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얼마전 우연히 보게된 외국 단편영화로 인해 배려에 대한 생각을 다른 측면에서 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 달리는 열차에 말쑥한 차림의 약간은 긴장한 모습의 젊은 남자가 타고 있습니다. 검표원이 지나가면 서 차표를 검사하기 시작합니다. 그 젊은 남자의 표를 검사하던 검표원은 그 남자에게 열차를 잘못 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의 표는 A역까지인데 이 열차는 직행이기 때문에 A역은 정차하지 않고 곧바로 B역까지 간다고 이야기 를 합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검표원에게 무슨 소리냐고 이 열차는 분명히 A역을 간다고, 당신이 잘못 알고 있다고 오히려 우기기 시작합니다. 검표원은 기가 막혀 합니다. 그러나 친절히 설명해 줍니다. "여보시오, 나는 이 열차의 검표원이요. 분명히 말하는데 이 열차는 분명히 B역으로 가는 직행열차요. A역은 서질 않소." 그러자 기세 좋게 우기던 남자는 금새 사색이 되어 버립니다.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A역을 가야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자신의 직장 이 있고 제 시간에 맞추어 가지 못하면 자신은 해고를 당할 거라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 천신만고 끝에 직장을 구했 으며, 그 직장에서 해고당하면, 자기의 처와 자식들, 늙으신 부모님은 어떻게 하느냐 울며불며 애원을 하며 A역에 세워주어야 한다고 통사정을 합니다. 어느새 그 남자의 안타까운 사정은 그 열차 칸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 고, 사람들은 그 남자를 도울 방법이 없을까 함께 궁리해 주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기관사에게 사정을 하면 무슨 수 가 생길 것이라고 하며 기관사를 찾아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기관사는 이 열차는 컴퓨터로 통제되는 것이라 자신이 임의로 세울 수가 없다고 답합니다.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그 남자는 또 울며불며 사정을 합니다. 자신이 해고되면 자기 가족은 모두 거리에 나앉게 된다고 애걸복걸을 합니다. 기관사는 생각 끝에, 이 열차는 정차는 할 수 없지만 서행을 할 수 있으니까, 그 A역을 통과 할 때 최대한 속도를 줄여 보겠다고 합니다. 기관사, 검표원, 그리고 한 칸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 남자의 딱한 사정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주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기관사는 열차가 서 행을 한다고 해도 계속 달리고 있기 때문에 내릴 때 조심해야 하며 달리고 있는 관성 때문에 뛰어 내릴 때 구르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달려야 한다고 친절하게 알려 줍니다. 이제 A역을 통과하게 됩니다. 같은 열차 칸에 있던 사람 들은 모두 긴장을 하고 그 남자가 무사히 뛰어내리기를 기대합니다. 기관사가 '자 지금'이라고 신호를 해주고 그 남 자는 무사히 내려 뜁니다. 사람들은 무사히 내린 것에 환호를 하고 그 남자는 계속 달리면서 자신을 배려해준 기관 사와 함께 탔던 그 열차 칸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그런데 그 뒤칸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손을 흔들며 뛰는 그 남자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어이쿠 저런' 하면서 얼른 문쪽으로 다가가 그 주인공 남자를 낚아채서 기차에 태웁니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열차를 놓칠 뻔 했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인정이 넘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좋은 사람들이었 습니다. 그러나 어떤 배려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게 합니다. 전혀 의도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배려란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와 다른 생각, 다른 느낌, 다른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섣부른 나의 판단으로 사랑을 베푼다고 인정을 베푼다고 하다가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낭패를 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배려는 내 입장에서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의 배려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사랑은 열정만이 아니고, 배려는 저절로 생기는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공동체 안에서 배우고 익혀나가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모를 때는 물어봅시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들읍시다.
* 홍보연(한국여신학자협의회 기독교여성상담소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