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삶의 뜨락 (2000. 8)
가슴에 품었을 때
이혜진
'문명금 할머니!'
이 분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분은 일제 식민지 때 18세
에 중국으로 끌려가 10 여년 동안이나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해 온갖 고초를 온 몸으
로 겪으셨던 분이다. 그 후 중국 땅에서 누구하나 의지할 곳 없는 처지가 되어 양로원에 사
시는 것이 알려졌고, 지난 해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에서 같
은 아픔을 가지고 계신 분들과 함께 살고 계신다. 할머니는 지난 4월 18일에 정부지원금과
시민단체 모금 지원금 4,300만원을 지급 받았다고 한다. 문명금 할머니는 지원금을 받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고 어디에 쓰고 싶었을까? 지원금을 보내는 분들은 할머니의 지난 삶을 보
상하는 차원에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시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베트남
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에 찾아와 지원금 전액을 기탁하였다고 한다. 전쟁의 피해와 후
유증으로 인해 고통받는 베트남 사람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위해 기금이 쓰여
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기금을 내놓을 때
"내 어릴 때 많이 고생했어. 그러나 내가 늙으막
이 여러 사람의 덕분으로 고국에 온 것 만 해도 고마운데 이렇게 정부에서 돈까지 주니, 내
어찌 국가의 돈을 혼자 배불리 먹는데 쓸 수 있겠소. 나는 밥을 먹을 수는 있으니 이 돈이
어려운 베트남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으면 좋겠소"
라고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그 돈은 아마
할머니가 지금껏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는 거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할머니의
처절했던 삶의 고통이 담겨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것을 흔쾌히 기탁하였다. 꽃다운 나이에
전쟁을 만나 삶 전체가 완전히 바뀌고, 평생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었던 할머니!
흔히 사람들은 고통 속에 살다보면 피해의식이나 미움, 원망 등을 키우며 살기 십상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식이나 '내 것은 내가 챙겨야 한다'는 의식, 미움과 불신 등을 벗어나 오히려 당신과 같은 처지, 전쟁의 피해로 고통받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것을 다 내어주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길게 남아 있게 된다.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가족이 죽거나 다 치고, 헤어져서 소식을 알 수 없는 등 전쟁이 끝난 후로도 그 상처는 평생을 두고 아파하며 고통받는 삶을 살게된다. 전쟁의 고통과 상처를 씻어내며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것들을 지난 우리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상기하자 6.25!"의 구호와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와 같은 6.25 노 래 등을 부르며 교육받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전쟁 속에서 남쪽에 고통과 아픔이 있었듯 북쪽에서도 고통과 아픔, 상처들이 있지 않을까? 전쟁을 겪으며 우리 민족 모두가 피해를 입었고 그 상처를 보듬고 살아온 것이다.
우리의 여름은 한국 전쟁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7.4 남북 성명, 7.27 휴전협 정, 8.15 민족해방절 등 온통 민족의 상처와 관련된 사건들이 한 여름의 열기만큼 뜨겁게 다 가오다 가을로 넘어간다. 그런데 올 여름은 전혀 다르게 다가오고 있다. "상기하자 6.25"가 아니다. "기억하자 6.15"로 바뀌었고, 교회에서는 6.25주일을 '민족화해주일'로 지켰다. 왜 달 라졌을까? 그토록 교육받으며 되새김질해왔던 미움과 불신은 어디로 갔을까? 불신의 찌꺼 기들이 여전히 우리 마음의 심연에 남아있지만, 우리는 그것보다 화해와 협력을 말하고 만 남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남북정상이 평양의 공항에서 두 손을 맞잡았을 때 우리 민족, 남 과 북의 동포들이 손을 맞잡았고, 또 두 정상이 서로 포옹했을 때 우리도 역시 남과 북의 형제 자매들을 함께 품었기 때문이다. 문명금 할머니가 자신의 아픔과 고통의 삶의 역사 속 에서도 그런 넉넉하고 큰마음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세월 동안 미움을 다 태워 비 워놓은 그 자리에 전쟁 피해자들의 고통과 고통받는 이웃의 아픔을 온 가슴으로 품었기 때 문일 것이다.
지금 남과 북으로 흩어졌던 이산가족이 만나는 기대와 설렘이 넘치고 있다. 앞으로도 많
은 교류와 협력이 있을 것이며, 남북관계는 더욱 화해와 통일을 향해 진전할 것이다. 그러
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불신의 색안경을 끼고, 상호주의를 말하며 주도적인 변화를 반대
하고 있다. 북의 노동당 규약을 바꿔야만 우리의 국가보안법을 손질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북
이 하는 만큼만 우리도 하겠다는 상호주의는 거래이지 화해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상호우선주의를 실천할 때, 내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 때 진정한 화해는 시작될
수 있다. 지금은 "상기하자 6.25"를 말할 때가 아니다. 나의 고통과 미움과 원망을 삭이고
내가 먼저 상대방을 가슴에 품을 때 진정한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 질 수 있다.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리라(마태 5,23)"
* 이혜진 (향린교회, 부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