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삶의 뜨락 (2001. 1)
내가 사는 이유
이선주
희망이 있어 사람은 시련이 있어도 그 희망을 의지해 열심히 산다. 그러나 "사람이 없고/희망이 없고/내일이 없는" 빈들처럼, 힘없는 노인들만 있고 빈집만 늘어나는 농촌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 도, 봄이 오면 다시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며 하늘을 보는 농민들의 삶은 숭고하다. 농촌에 살지 않았다면 끝내 알 수 없었을지도 모를 그들의 눈물나는 삶을 통해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 고 절망 속에서도 꽃은 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4년 전에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왔을 때는 산 속에 들어 앉은 교회가 한가롭게 보여 좋았다. 예 배 드리는 날이 아니면 찾아 올 사람도 없고 하여 교회 옆 빈터를 일궈 집사님들이 주시는 파와 부추를 심으며 소일을 했다. 아침에 방문을 열면 안개가 내려 앉은 마당이 신비스러웠고 사철마 다 변하는 산과 들은 알게 모르게 상처 받은 심령을 치료해 주기에 충분했다.
부족한 사람이라 실수가 많았던 지난 날, 사람과 만나 이야기 하는 것도 무서웠는데 자연과 벗 하며 어느만큼 살고 나니 부끄러웠던 자신을 스스로 용납하게 되었다. 또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 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겠다는 마음에까지 이르렀다. 목회를 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일임이 분명 한데 사랑하지 못한 기억들 때문에 스스로 상처 받고 괴러웠던 기억들로부터 해방된 것은 흙과 더불어 살게 된 이유가 되었다. 흙의 포용력은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썩어지는 모든 것을 한 없 이 품어 일체를 이루지만 썩지 않는 것은 마지막까지 거부한다. 내가 썩어져서 만들어 내는 세 상, 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일거라는 믿음으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주위에 시골의 작은 교회이지만 여러 큰 교회로부터 선교비를 받아 때가 되면 마을 분들을 위 해 잔치도 하고 의료진도 초청해 의료활동도 한다. 어느 분이던가! 부흥회도 하고 마을 아이들도 챙기고 하시며 봉고차에 교인들을 가득 모시고 다니는 성실하고 열정 있는 목사님께서 한 교회에 오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당찬 말을 우리에게 드러내놓고 하신다. 그 목사님 말씀이 옳긴 옳네. 십 년 넘게 있어도 교인은 오히려 줄고 먹고 살기 바빠 여기 저기 도움을 청해야 하는 모습 이 얼마나 초라하고 무능하게 보였을까!. 종종 사모님들 사이에서도 아무개 목사가 도시로 나가더 니 마침 교회 옆에 아파트가 생겨 교회가 급성장를 했다며 넓은 곳으로 나가야 목회도 할 맛 난 다며 숫자와 물질에 우선권을 부여할 땐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목회도 있고 저런 목회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자. 하박국의 말씀처럼 "비록 무화 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여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 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 로다" 함이 내 믿음의 고백이라면 이곳에서의 생활도 은총이며 축복이다. 땀흘리는 농민들에게 얼 음물을 갖다 주고 만나는 어른들에게 인사하며 날씨와 건강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이지만 나 의 기도는 간절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 기네 뱃속을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빌립보서 3:18-19) 주님! 기억해주세요. 일에 지치고 짓궂은 날씨 때문에 농사가 망 치고 잘된 농사도 제값 못 받아 한숨만 쉬는 어찌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이지만 그들과 함께 살 아가려고 하는 일, 역사 속에서 짓밟히고 세상에서 소외 당해 왔어도 때가 되면 뉘었던 마음 일으 켜 제 할 일 하는 이 사람들을 주님, 기억해 주세요. 묵묵히 자연의 섭리를 따라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이요, 아들이며 딸입니다.
꿈도 있고 패기도 있어 안 해 본 것 없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본 후 허탈과 절망의 자리에서 견디다 못해 그만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께선 그걸 용납하지 않으시고 무릎 끓여 앉히 게 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였는지 아닌지는 알지 못해도 어쨌든 남편과 나는 다시 시작하기 로 결심했고 오래 머물러 그들과 함께 하자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었다. 역시 하나님께선 실패 한 자와 절망한 자에게도 예수의 꽃을 피워주셨다. 나는 그래서 기도한다. 주님 ! 이곳에서 썩어지 며 나의 꽃을 피워 오가는 사람들에게 향기를 뿌리게 하옵소서.
* 이선주 (괴산 길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