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기
내 마음을 뭐라 꼭 표현하고 싶은데 글재주가 없어 적당한 단어나 어구가 생각나지 않아 답 답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우연히 펼쳐든 책 속에서 내 마음의 표현과 같은 글을 발견했을 때 가슴 벅차 그 구절을 베껴 책상 앞에 붙여두고 오래 오래 생각하곤 한다. 그렇게 좋아 하게 된 시중에 이해인 수녀의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라는 시가 있다.
'하늘에도 연못이 있네' 소리치다 깨어난 아침 창문을 열고 다시 올려다본 하늘 꿈에 본 하늘이 하도 반가워 나는 그만 그 하늘에 빠지고 말았네 내 몸에 내 혼에 푸른 물이 깊이 들어 이제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운명처럼 걸어가게 된 그 길이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이제 다른 길은 생각조차 못하 는 시인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시가 처음 읽을 때부터 눈에 쏙 들어 왔었다. 아마 쉴새 없이 변덕 부리고 기회만 있으면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안정되지 못한 내 모습이 못내 한심스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지금까지 공부를 할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신 앙의 길을 걸어갈 때도 나의 이런 꾸준하지 못한 모습 때문에 실망하기도 하고 자책하기도 하였다. 내 속에 있는 새로움과 자유로움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들은, 내 앞에 놓여진 길을 쉼 없이 똑바로 걸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악마의 유혹이라고 애써 규정 지워도 그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 더 솔직한 심정이리라.
그러나, 사람의 길이란 정말로 한가지로 운명 지워져서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 것은 하느 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경한 것일까? 오히려 상황과 때마다 다양하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 성을 들을 수 있고 그 뜻을 발견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세상을 향하여 열려진 태도 를 가지는 것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 시는 이 길만이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 다는 믿음이 아니라, 지금 걸어가고 있는 길을 한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걸어가리라는 고백 의 기도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오래된 습관처럼 아무런 감동도 없이 악세사리 같은 십자가 를 바라보고, 희망에 벅찬 감격도 없이 주님의 부활을 노래하는 매너리즘에 빠진 내 모습에 흠짓 놀라 신세한탄처럼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고 노래부르는 나에게는 날마다 새로운 자극과 도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도 늘 고정되어 있는 가르침에 눈이 굳어져서 더 이상 새로운 주님의 음성을 듣기 어려운 것이 믿음을 가진 이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심해지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듣기보다는 말하기 좋아하는 못된 버릇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도 발동하니 제대 로 그 음성을 들을 리 만무하다. 이제 와서 주입식 교육을 탓하고, 편식한 독서 습관이나 보 수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받은 어린 시절을 안타까와 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 는가?
월요일마다 찾는 공동체 성서연구는 화석처럼 굳어져 가는 내 모습에 용해제를 마시는 기 분이 든다. 여러 사람들이 각자가 느끼고 생각하는 말씀에 대한 느낌들을 나눌 때 은혜를 받고,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다양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도들이 나에게는 소중한 훈 련이 된다. 이 시간에 나는 하나님 앞에 열려져서 다양한 가능성에 반응하고, 하늘의 부르심 에 그때마다 새롭게 응답할 수 있는 유연한 자세를 가다듬는다. 이 시간은 새로운 영역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나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을 주님을 향하여 열어놓음으로써 주님께로 방향 을 수정하는 시간이며 힘있게 그 길을 걸어가게 하는 용기를 얻는 시간이다.
이해인 수녀의 시가 그런 과정들을 거친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고백이라면, 좋아하는 또 한 명의 시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좋아하는 것은 그 구도의 과정에 있는 내가 공동체 성서연구를 찾는 마음이다.
세월이 흐른 먼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깊은 숨을 내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다닌 길을 선택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조정기님
성공회 영등포교회 전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