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규 연재동화

강정규 연재동화 (2001. 2)

아버지의 향기

"무슨 일로 오셨나요? 중학교는 저 쪽인데."
선생님이 내 교표를 보며 말씀하셨다.
"선상님, 여기는 농업학굥게 아직 거름이 필요허겄쥬?"
"거름유?"
"에, 똥유."
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다시 웃음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나오지 말아야 할 때 웃음이 자꾸 나와서 나는 참 곤란했다. 아버지는 엄숙하게, 선생님에게 예의를 차리느라고 애쓰시는데 내 목구멍에서는 꼬무락꼬무락 웃음이 기어 나오려하고 있었다.
"실은 제 아들놈이 뒷간에다 시계를 빠쳤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녀석이 제 아들 놈인디. . . .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지 원, 웬 날씨가 이렇게 더운지. . . ."
아버지는 쩔쩔매고 계셨다.
"여기 우선 앉으십시오. 그리구 천천이, 차근차근 말씀허세요."
선생님이 의자를 돌려놓으시고, 부채까지 내놓으셨다.
"실은, 제 아들놈이 해수욕장에 댕겨오다가 배탈이 나서. . . ."
아버지가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나는 민망하고 무안하고 면구스러워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는 우리 교실까지 왔다. 커튼이 내려져 있고, 교실 안은 조용했다. 교무실 쪽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복도를 빠져나왔다. 고등학교 쪽으로 걸어오는데 아버지가 교무실 에서 나오셨다. 당직 선생님도 따라 나오셨다. 두 분은 창고 모퉁이를 돌아 후문 쪽으로 가셨다. 후문 밖은 농장이었다.
"여기가 거름통입니다. 마침 지난봄에 쓰고 남은 거름이 소량이군요."
거름통은 지붕이 되어 있었다. 거름통 옆은 농기구 창고였다.
"여기다 퍼다 붜두 되겄네유."
아버지가 거름통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저는 담당이 아니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거름이 필요허긴 필요헐 겁니다. 나중에라두 담당 선생님에게 말씀드리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고맙습니다. 내일부터라도 퍼다 붓겄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 녀석, 어쩌다 변소에 시계는 빠뜨려?"
선생님이 내 머리를 툭 치며 말씀하셨다. 나는 다시 민망하고 면구스러왔다.
"안녕히 계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아버지가 밀짚모자를 벗어들고 인사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 걸음을 빨리했다.
"인규야, 여기 좀 있거라, 역장님 좀 뵙고 나오마."
역에 도착한 아버지는 밀짚모자를 벗어들고 내게 말했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가므로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역무원실에 다녀 나오신 아버지는 금세 풀이 죽어 있었다.
"지금은 해수욕철이라 구린내를 풍길 수가 없다는 구나. 8.15가 지나서 해수욕장이 폐장돼야 풀 수 있대야. 그리구 똥 푸는 사람두 따루 정해져 있단다. 아무나 풀 수 없다는구나. 여하튼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자. 수고혔다."
아버지는 차표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