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이 등불을 켜들고 빗자루로 쓸면서 온 집안을 헤집 고 다닌다는 내용이다. 이야기의 초점은 잃어버린 동전 자체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동전을 찾은 뒤의 기쁨이 정작 중요해 보인다. 여인은 배보다 배 꼽이 클 정도로 풍성한 잔치를 베풀고 이웃사람들을 초청하여 함께 기쁨을 나 눈다. 이 한편의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여인으로 표상된 하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에게 큰 잔치를 열어 위로하고 영접하는 하나님 나라의 밑그림과 만나게 된다.
오늘날 호주제 폐지를 위해 싸우는 여성들을 보노라니, 성서 속의 그 여인 이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느낌이다. 어김없이 한 손에는 등불이, 다른 손에는 빗자루가 들려있다. 그 여성들은 호주제에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이 땅의 수많은 여성들의 고통에 등불을 비추면서 악제(惡制)를 쓸어내고자 분투한다. 그들이야말로 죽임의 권세에 맞서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하나님의 파트너들이 다.
호주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출생과 사망, 혼인 및 이혼 등 개인의 신분변 동사항을 추적, 기록하여 민법관계를 규율하기 위한 신분등록제도이다. 그 자 체로는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이지만, 현행 호주제도는 혼인시 여성이 남편의 호 적에 입적해야 하고 자녀는 아버지의 성을 의무적으로 따라야 하는 등 부계혈 통만을 인정하고 있어 여성의 온전한 주체성과 독립성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호주승계의 순위 역시 '아들(손자)-미혼의 딸-처-어머니' 순으로 정해놓고 있 어 남성우월주의와 남아선호사상을 부추기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호주제는 "혼인과 가족생활에서 개인의 존엄과 남녀평등을 보장한다"는 헌법 제36조 1항의 정신에 위배됨과 동시에, "가족의 성씨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 다"는 UN여성차별철폐협약 제16조에도 위배되는, 비민주적이며 봉건적인 제도 인 것이다.
호주제 수호에 앞장서고 있는 유림(儒林) 측에서는 호주제가 우리 민족 고 유의 미풍양속이자 전래의 가족제도여서 호주제 폐지는 곧 가족해체를 의미한 다고 못을 박는다. 하지만 고려시대만 해도 남편이 사망하면 그 배우자가 한 가족의 대표가 될 수 있었고, 기혼인 딸도 친가호적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사 실인즉 호주제는 본래 일제가 식민지 주민을 지배하려는 목적에서, 즉 징병 및 징세를 원활히 하고 독립군을 색출하기 위해 강제로 이식시킨 외래 유산인 것 이다. 그렇다면, 북한도 이미 1946년에 폐지하고 일본마저 1947년에 철폐하여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게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호주제를 여전히 존속시킬 까닭이 있을까? 1990년에 대대적으로 개정된 민법에 따르면 호주 '상속'이 '승 계'로 바뀌고 심지어 해당자가 승계를 거부할 수도 있게끔 되었다. 또한 친족 의 범위에 있어서 친가와 처가 사이에 차별이 없도록 양쪽 모두 8촌까지 친족 으로 규정되었으며, 성별이나 출생순위에 상관없이 자녀의 균등한 상속을 보장 하는 재산상속제도가 마련되었고, 아내의 재산분할 청구권과 친권행사 및 양육 권에 대한 법적 근거가 정비되었다. 더욱이 1997년에 단행된 '국적법' 개정에서 는 국적 취득시 부모양계혈통주의 원칙을 적용시킴으로써 부계혈통주의를 상 대화시켰다. 따라서 호주제는 이제 알맹이없는 껍데기만 남은 셈인데,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관습과 문화와 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에, 1년에 3만여명에 달하는 여태아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즉 호 주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낙태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호주제는 이제 더 이상 산업화로 인해 핵가족화된 우리의 현실과 이혼 및 재혼 등으로 다양해진 가족의 실태를 전혀 담아내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남녀고용평등법"이나 "남녀차별금지법" 등 여성의 사회참여와 자아실현을 북 돋우는 법제들과 양립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역행할 따름이다.
남편이 사망한 한 중년여성은 장성한 딸이 버젓이 있는데도, 호적 상 호주 가 남편의 혼외자녀인 세 살배기 아들로 되어있는 것이 못내 서럽다. 이혼을 하고서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또 다른 여성은 자녀가 여전히 남편의 호적에 그대로 남아있고 자신의 주민등록표 상에는 그저 '동거인'으로 분류되는데 분 노한다. 이혼녀와 재혼한 한 남성은 아내의 자녀들을 친자식같이 사랑하고 부 양하는데도 그들이 자신의 성을 이어받지 못하는데 가슴아파한다. 친부로부터 외면 당해 생모와 살고있는 딸들은 왜 아직도 그 무책임한 생부가 자신들의 호주여야 하는지 다만 의아할 뿐이다. 이들 모두가 오늘날 하나님의 위로를 간 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편협한 가족이기주의나 족보 우월주의, 그리고 궁극 적으로는 가부장제의 미몽에서 깨어나기를 바라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 의, 평화, 창조의 보전(JPIC)을 위해 일하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남녀 모 두의 인간화를 위해, 그리고 여성의 온전한 평등과 자율성이 이루어지기를 위 해 호주제 폐지운동에 동참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걸어가는 그 길 앞에는, 한 손에 등불을 켜들고, 다른 손에 빗자루를 들고서 앞장 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억눌린 자들의 신음소 리를 들으시고 자유와 해방에로 이끌어내시는 출애굽의 하나님이 이 땅의 무 수한 여성들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한다.
* 구미정 (기독교윤리학 박사, 편집위원, 협성대, 목원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