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지난 4월 임시국회에서 모성보호 관련법안*이 '2년 유보'라는 딱지를 달고 통과됨으로써 사실상 거부당했다. 모성보호와 관련하여 법률을 개정하자는 논의는 일찍이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과 자민련, 한나라당 등 여야 3당 모두의 공약사항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서 3당은 하나같이, 이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법안 심사소위원회까지 통과하여 오는 7월 부터 즉각 시행에 들어가기로 합의된 법안에 대해 '시기상조론'을 펼치며 반대하고 나선 것 이다. 이유인즉, 경총과 전경련 등 경제단체들이 공동기자회견을 열고서, 이 법안이 시행되 면 기업부담금이 연간 8500억원이나 추가로 들어간다고 불만과 우려를 표시했기 때문이다. 이 수치는 본래 여성부와 여성계가 산정한 비용보다 무려 7천억원이나 웃도는 비현실적인 액수로서, 출산한 여성노동자 전체와 출산한 아내를 둔 남성노동자 전체가 육아휴직을 신청 한다는 전제하에 매겨진 값이었다. 그런데도 정계는 재계의 이러한 비합리적인 산술법을 그 대로 수용하여, 우리 경제여건상 현재 모성보호법을 시행하기에는 아직 무리이니 나중에 경 기가 회복되기를 기약하자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덮어버렸던 것이다.
결혼을 약속한 사내가 순진한 처자를 꼬셔 몸도 마음도 재물도 다 빼앗고는 돈이 없으니 당분간 결혼식을 미루자고 꼬드기면 필시 그 사내의 '사랑'과 '진지성'을 의심해 볼 일이다. 심지어 현행 헌법은 상습적으로 그렇게 여자를 울리는 나쁜 남자에게 '혼인빙자간음죄'라는 포박을 씌워 구속하기도 한다. 지금 정ㆍ재계의 작태를 보노라니 영낙없이 여자 가슴에 오 뉴월 서릿발같은 '한'을 남기는 못된 남자가 떠오른다. 내뱉느니 사탕발림이요, 어르느니 뻔 한 속임수 뿐이라, 여성의 삶과 사랑과 행복과 건강에 대한 염려라고는 손톱만큼도 없고 그 저 이용할 궁리나 한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대졸 이상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이 꼴찌(54%)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OECD 회원국 평균치인 83%를 훨씬 밑도는 수치로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여성취업의 낙후지대인가를 보여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아니 불행히 도 아직까지) 여성은 취업하려면 반드시 '용모단정'이라는 장애물을 통과해야 했다. 성형수술 과 다이어트로 일단 몸을 만든 다음에 어렵사리 취직의 관문을 뚫은 뒤에도 '결혼하면 퇴직 하겠다'는 각서를 써야만 비로소 직업여성으로 거듭나는, 야만의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남 녀고용평등법이 버젓이 존재하는 현 시점에서도 여전히 여성들은 기업의 불안정한 고용구조 와 악화된 경제사정에 밀려 취업 2순위에 머물러 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취직을 한다고 해도 남성노동자 평균임금의 63%밖에 받지 못하고, 세 명중의 두 명이 언제 쫓겨날지 모르 는 비정규직에 몰려있는 실정이다.
세계적인 컨설팅 전문회사인 매킨지와 매일경제신문이 공동으로 내놓은 '우먼 코리아 보 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이런 식으로 여성의 노동단절 현상을 방치할 경우, 2010년에 선 진국 대열에 진입하겠다는 국가적 목표 달성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연령대별 경제활동 참가율은 20대 중반과 40대 중반에 비교해 30대에 뚝 떨어지는 '엠자형 곡선'(M-curve)을 이루는데, 그 까닭은 이 무렵의 여성들이 주로 결혼-임신-출산-육아로 이 어지는 인생주기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한창 일을 배워서 능력을 발휘해야할 시기에 상당 수 여성들이 가사노동과 육아에 대한 부담 때문에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직장을 떠 난다는 말이다. '우먼 코리아 보고서'는 향후 10년간 뒤바뀌게될 노동시장의 동향으로 미루 어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90%대로 끌어올리는 획기적인 노력이 있지 않으면 한국경제 의 미래가 없다고 단언한다.
요즘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s)족이 늘어나는 것은 그 만큼 자녀가 있는 기혼여성의 경제활동이 어렵다는 것을 반영해준다. 1999년도 우리나라 여 성의 출산율은 1.42로, 선진국 평균 1.56명보다 낮았다. 이대로 가면 2015년부터 우리나라의 전체인구는 감소추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한다. 정부에서는 오히려 출산을 장려하는데, 여성 들은 애낳기를 꺼려한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국가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여 양육의 책임 을 분담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결혼과 상관없이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자녀를 낳아 기를 수 있다는데, 우리네 형편에서는 일방적으로, 또 전적으로 엄마 쪽에 양육의 책임이 전 가되어 있으니 어느 '겁을 상실한' 여자가 감히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전쟁'에 뛰어든단 말 인가? 전업주부는 전업주부대로 '무능력하고 게으른 아줌마'로 도태될까봐 노심초사하고, 취 업주부는 취업주부대로 '애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이기주의자'로 낙인찍힐까봐 마음 이 편치 못한 게 오늘을 사는 여성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어린이는 미래의 희망'이라고 무책임한 구호만 남발할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애를 낳고도 어떤 죄의식이나 부담감 없이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육아에 대한 사회적 분담체제를 만들어주는데 전념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더 이상 육아는 엄마만의 몫일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 가 무슨 '봉'이라고 자신들의 노후를 손주 뒷치닥거리에 저당잡혀야 하는가? '제3의 길'이라 는 정치경제적 대안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여성들의 고민거리를 함 께 나누고자 성실히 노력하는 자세를 보일 때, 거기에 대안이 있고 길이 있다. 여성들은 다 만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볼 일이다. 국가가 위선적인 가부장제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여 성노동자들에게 얼마나 진지한 사랑으로 응답하는지를.
* 여성부와 여성계가 발의한 모성보호 관련법안의 주요골자는 이렇다:
◇ 출산휴가를 현행 60일에서 90일로 늘려줄 것
◇ 육아휴직 때 임금의 30%를 지급할 것
◇ 월 1회 태아검진을 위한 휴가를 신설할 것
◇ 유산ㆍ사산 휴가제를 도입할 것
* 구미정 (기독교 윤리학 박사, 협성대, 목원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