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오고 난 후 어머니가 가장 욕심을 낸 건 '텃밭'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시멘트 바닥을 확 걷어내고 싶었지만 세들어 사는 형편에 그러기가 쉽지 않아서 고작해야 나무궤짝이나 스티로폴 상자에 흙을 구해다 만든 '무늬만 텃밭'이었다. 지금은 상추며 고추며 방울토마토를 따먹는 재미가 제법 솔솔하고, 언젠가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물방개까지 노닐다간 텃밭이지만, 처음 마당에 주섬주섬 빈상자들이 놓일 때만해도 여간 심란하지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도심 한복판에서 흙 구경하기가 도무지 쉽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자연의 풍화작용이 암석으로부터 흙 1그램을 만드는데 무려 300년이나 걸린다는데, 우리 도시인들은 뭘 믿고 그렇게 쉽사리 흙 대신 아스팔트와 시멘트를 선택했는지 새삼 기가 막혔다. 결국 어머니는 가까운 화원에 서 흙을 사오기도 하고, 때로는 멀리 사촌언니가 사는 광릉내며 외할머니 무덤이 있는 강화도에서 까지 흙을 퍼다가 상자들을 채우셨다. 그리고 부지런히 손을 놀리신 덕에 우리 가족은 여름내내 자연친화적 밥상을 대할 수 있었다.
지난 3월부터 농림부에서는 우리네 밥상에 친숙한 콩, 옥수수, 콩나물에 대해 유전자조작 농작 물(GMO, Genetica- lly Modified Organism) 표시제를 시행하였고, 이어 7월 13일에는 식품의약안전 청이 식품에 대해서도 표시제를 확대실시한다고 발표했다.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본격적으로 실시될 표시제에 의거해, 유전자조작 농산물로 만든 가공식품 - 빵 및 떡류, 두부, 두유류, 영아 용 조제식(분유), 성장기용 조제식(이유식), 된장, 고추장, 메주, 옥수수, 팝콘 등 27개 품목 - 은 포장지에 "유전자 재조합"이라는 표시를 붙이게 된다. GMO의 상업적 생산이 본격화된 1996년 이후 GMO를 취급하는 가게가 화재를 당하기도 했던 유럽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국민 대다수가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편이지만, 이제나마 표시제를 시행하게 된 것은 소비자의 알 권리 차원에 서 퍽이나 다행한 일이다.
GMO는 인류의 식량문제와 건강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준다는 장밋빛 환상을 등에 업고 다국적 곡물기업들이 '꿈의 작물'로 포장해 내놓은 상품이다. 70년대에 붐이 일어난 제1세대 GMO가 제초제 나 병충해에 강한 작물이었다면, 90년대의 제2세대 GMO는 맛과 영양 면에서 뛰어날 뿐만 아니라 질병예방까지도 신경 쓴 작물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암예방 성분이 함유된 토마토나 비타민 A를 강화시킨 황금쌀같은 경우가 그렇다. 몬산토 등 다국적 곡물기업들은 GMO가 세계인구 80억명을 넘어설 21세기에 인류를 먹여살릴 '마법의 탄환'이라고 선전한다. 단 한방이면 끝내주는 해결사라 는 것이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데다 건강까지 책임진다니 듣기에 이토록 달콤한 말이 또 있으랴?
그러나 본래 유혹은 달콤할수록 쓰디쓴 대가를 요구하는 법이다. 성서의 타락설화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이 바로 그것 아닌가? 우선 GMO가 인류의 식량 위기 극복을 위한 최선의 대안인 것 처럼 떠드는데 속아서는 안된다. 식량문제는 양(量)의 문제가 아니라 나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매일 13,063톤의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는데, 북한에서는 다섯 살 미만 어린이 1천명 당 48명이 굶어죽는 비극이 오늘도 그치지 않은 현실이야말로 식량문제의 본질인 것이다. 우리는 GMO가 식품의 영양을 개선해주고 환경오염을 줄여준다는 낙관론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국내 식품관련 전문가들 10명중의 8명은 GMO 식품이 독성이나 부작용을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한다. 인 류가 그동안 한번도 먹어본 일이 없는 신종 GMO는 그것이 인체에 어떤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우리 후손들과 생태계에 어떤 누적적인 결과를 초래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미국 어 느 대학의 모의실험에서는 유전자조작 물고기 한 마리가 40세대 내의 물고기 전체 무리를 멸절시 키는 결과가 예측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제초제나 해충에 저항력이 강한 GMO는 몇 년만 지나면 내 성이 생기기 때문에 오히려 농약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하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이것은 결국 땅 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GMO는 결코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보아 96년에 불과 170만㏊에 불과했던 GMO 재배면적이 지난 해에는 무려 4,300만㏊ 로 25배나 늘었다. 그렇다고 그 사이 지구상의 남북문제가 해결되었냐하면, 불행히도 더욱 심화되 었을 뿐이다. 다국적 곡물기업들은 GMO에 대해 특허권을 쥐고서 종자를 독점적으로 판매하며 제 배 만 불리고 있다. 그들은 종자가 다음해에는 싹이 트지 않도록 유전자를 조작하는 '터미네이터 기 술'과 자기네 회사의 농약제품을 뒤집어써야만 싹이 나도록 조작하는 '트레이터 기술'로 세계의 종자 시장을 정복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세계3대 농업생명공학기업인 몬산토, 노바티 스, 아벤티스사가 진출하여 이미 종자시장의 70퍼센트를 점령당한 실정이다.
막대한 자본과 권력과 기술로 우리의 밥상을 맹공격하고 있는 GMO로부터 우리 자신의 건강과 아이들의 생존을 지켜낼 자 누구인가? 골리앗처럼 버티고 있는 다국적 곡물기업들의 횡포에 맞서 희망을 가져올 자 누구인가? 이 대목에서 슬며시 살림하는 주부들에게로 시선이 간다. 관습이란 참 뻔뻔한 것이다. 저지르는 쪽은 따로 있는데 치우는 일은 꼭 여성 몫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어 쩌랴? 그것이 지혜의 영(Sophia)을 받은 우리의 운명인 것을. 우리는 모두 '생명'이라는 뜻의 이름 을 가진 하와의 후손인 것을.
이 땅의 여성들은 이제 죽임의 밥상에 맞서 살림의 밥상을 차리라는 새로운 위임 앞에 서 있다. 유전자조작 농산물 및 식품 표시제 시행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GMO를 거부하는 운동(일명 GMO-free) 을 벌임으로써 하나님의 생명 살림에 동참해야 한다. 지금 우리 어머니의 텃밭에서는 조용한 혁명 이 일어나고 있다.
* 구미정 (기독교윤리학 박사, 편집위원, 협성대, 목원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