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베다니의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골치 아픈 주제이고, 또 그런 만큼 해석도 구구하다. 하지만 주석상의 견해나 신학적인 쟁점을 잠시 접고, 누가복음 10장 38-42절의 장면을 우리 일상과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새삼 마르다가 처한 상황이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다. 특히 추석이나 설날 같은 우리네 큰 명절에 며느리의 눈으로 이 본문을 읽어 보라. 어느 누가 손수건 없이 읽으리요?
'잘 나가던' 친구가 있었다. 명문대학을 나오고 좋은 회사에 다니며 남편보다 더 높은 봉급을 받던 '캡' '짱' '퀸카' 였다. 얼굴 예쁘지, 능력 많지, 게다가 성격 좋지, 정말 부러울 정도로 삼박자를 고루 갖춘 멋진 친구였다. 그런 그가 '며느리는 사람도 아니라' 며 전화통을 붙잡고 서럽게 울던 날, 이 땅의 며느리라는 가혹한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 역시 한참을 덩달아 울고야 말았다. 결혼 직후 처음 맞는 추석이었단다. 당차게 맏아들과 결혼한 그녀는 마침내 명절의 쓴맛을 톡톡히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자기는 그 많은 시집 식구들과 친척들 수발하느라, 좀 과장해서 말하면 발바닥에 땀띠가 나도록 부엌에서 일을 하는데, 시누이는 얌체처럼 송편만 축내며 남자들 고스톱 판에서 개평이나 뜯고 앉았더란다. 그렇지 않아도 이 '엽기적인'(그러나 지극히 '정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성(性)차별적 관행에 진저리가 나던 차에, 같은 여자면서 '성(姓)씨가 같다고' 어떻게 저만 '공주'과인가 싶어 일 좀 거들어 달랬더니, 시어머니가 자기만 나무라면서 덧붙이는 말씀: "자고로 옛말에 며느리와 소는 명절에 아프면 안된다고 했느니!"
이 일이 있은 후부터 그 친구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은 물론이요, 제사나 시어른 생신 같은 집안의 대소사가 있는 때이면 으레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고 소화불량에 불면증까지 겹쳐 곤혹을 치른다고 했다. 의사가 아니라도 척 보니 알만 했다. '명절 증후군'인 거다. 이 땅의 무수한 며느리들을 자아분열과 자기파괴에로 몰아가는 치명적인 명절 바이러스다.
우리 민족에게 추석과 설날은 단순히 절기행사가 아니다. 전국의 고속도로를 꽉꽉 메우는 귀향행렬을 보노라면 이건 완전히 종교행사라는 느낌이 든다. 그들은 지금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으로, 아니 생존경쟁에 지쳐 늘 잊고 지내는 자신의 뿌리에로 회귀하는 중이다. 그래서 명절 전야의 고속도로는 마치 젖줄과 탯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교통지옥을 해마다 겪으면서도 흩어졌던 가족친지들이 한데 어울려 반갑게 정을 나누는 풍경은 그 자체로 인간적이기도 하거니와 종교적인 구속감마저 주는 것이다.
그러나 '명절 증후군'이라는 신조어가 보편적으로 나돌 정도로 우리네 명절은 이미 중병에 걸려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남자들이 먹고 놀며 모처럼의 휴식을 즐기는 사이, 여자들, 특히 며느리들은 평소보다 몇 배의 가사노동을 하며 '뺑뺑이'를 돌아야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명절이라는, 더 나아가 가족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빌린 폭력인 것이다.
대부분의 며느리들은 차라리 명절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딸만 있는 집들도 명절이 아예 고문이기는 마찬가지다. 그 틈새에서 아들/사위가 편안할 리 없다. 어머니 눈치보랴, 아내 눈치보랴 그들도 나름의 명절증후군을 앓을게다. 그러나 의외로 해결의 실마리는 거기서 나온다. 남편이 중립을 지킨다는 허위의식을 떨쳐버리기만 한다면,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어느 편도 들 수 없다는 핑계로 '부당이득'을 챙기지만 않는다면, 기꺼이 제 한 몸 십자가에 달아 널리 구원을 이루겠다는 대아적(大我的) 자세를 취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명절문화에도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
우선 남편들은, 남성으로서 자신이 구원받고 치유되려면 부엌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음식만들기는 그렇다치고 설거지와 청소만이라도 전담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 명절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질 것이다. 올 추석은 처가에서, 내년 추석은 시집에서 보내는 식으로 과감히 결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고, 해마다 지지고 볶고 굽고 부치고 튀기느라 정신없는 고전적인 틀을 바꾸어 음식배달업체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모처럼의 추석 연휴를 가족여행으로 기획해보는 것도 한 대안이다.
하지만 그의 결단이 아무리 갸륵하고 혁명적인들 시집에서 동조해주지 않으면 피차에 '살리는 명절'이기보다는 '죽이는 명절'이 되기 십상이다. 고로 시부모 입장에서는 아들의 모처럼의 결정을 존중하여 '함께 만드는 명절'이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딸을 동시에 부엌으로 들여보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러한 약간의 갱신은 명절증후군을 완화시킬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치료약이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시부모는 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부터 되물을 일이다. 그의 딸 사랑이 올바르다면 며느리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할 것이고, 명절을 시집 위주로만 보내는 것 역시 형평에 어긋나는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옛부터 제사상의 본질은 나누어 먹는데 있었다. 명절음식을 풍성히 장만하는 것은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의 관습이기도 하거니와, 되도록 많이 만들어 여럿이 나누어 먹으려는 인간적인 속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먹을 것이 지천인 시절에도 그렇게 명절음식 장만에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지 재고해 보아야 한다. 오히려 먹고 마시는 일보다는 함께 모여 정담을 나누고 어울리는 일에 명절의 초점을 맞추되, 음식 장만에 들어갈 비용을 조선족이나 외국인 노동자 단체에 후원하는 것도 아름다운 명절 풍습이 될 수 있다. 이 땅에 몸 붙여 사는 한 그들 역시도 명절을 즐길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부디 마르다의 추석이 달라졌으면 좋겠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좋은 몫'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고, 누구나 누려야 한다는데 강조점이 있는 것 같다. 좋은 몫을 빼앗기지 않을 권리는 마르다에게도 있다. 모두가 즐겁게 손꼽아 추석을 기다릴 권리가 결코 소수에게 독점되어서는 안된다.
* 구미정 (기독교윤리학 박사, 편집위원, 협성대, 목원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