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다. 모두들 심각한 표정으로, 때로는 진지함이 지나쳐 완전 무미건조한 석고상처럼 딱딱한 표정으로 도배된 얼굴들 틈에서 유독 그에게서는 진짜 살아있는 사람의 다양하고도 생생한 향기가 퍼져나는 것 같았다. 어쩌다 힐끗 돌아보아도 여전히 얼굴 가득 모나리자보다 훨씬 더 그윽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쌍꺼풀 진 시원한 눈에는 특유의 순박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첫인상이, 착해 보이고도 넉넉함과 총명함을 두루 풍기는 아나운서 이금희를 연상시켰다.
"막달레나 타노"(Magdalena Tano - 줄여서 '매기'). 많은 필리피노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도 생긴 건 우리 쪽인데 이름에서는 버터냄새가 났다. 지난 9월 16일부터 22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스카 회의(ACISCA, 아시아기독교단체협의회) 개막식장에서 처음 본 이래 매기는 줄곧 가슴 저미는 아름다움으로 내 안에 각인되어 있다.
나이는 비밀이라며 살짝 웃었지만 족히 스물 여덟이나 되었는데도 키가 어른 허리에 채 못 미쳤다. 왜소증이어서가 아니다. 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어서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팔꿈치 아래와 무릎 아래가 없다. 젖꼭지만하게 두가닥으로 조금 분화되다가 만 살점이 꼼지락댈 뿐이다. 그런 팔로 그는 잘도 쓰고 잘도 먹는다. 휠체어에 의존할 법도 한데, 밑창이 닳아빠진 '쪼리' 슬리퍼만 있으면 안 다니는 곳 없이 뒤뚱거리며 잘도 활보한다. 한번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함께 배를 타고 섬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다리가 멀쩡하다못해 '조선무'를 자랑하는 나도 시퍼런 바다 위에 살짝 걸쳐진 한 뼘 짜리 널빤지를 지나노라니 졸도할 지경이 되어 호들갑을 떨고 있는데, 그는 그야말로 물찬 제비처럼 쏜살같이 건너는 것이었다. 정말 대단한 균형감각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말로 하면 그녀는 충분히 '엽기적'이었다.
나는 그에 대해 경이로움이라는 단어 말고 달리 적당한 수식어를 찾지 못하겠다. 그 한없이 수줍어하는 목소리와 얌전해 보이는 인상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 있을까? 그가 살아온 발자취를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경이로움에 더하여 존경심마저 들게 된다. 그는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매를 맞으며 자랐다. 생계에 쪼들리고 남편에게 구타당하며 어렵게 살던 어머니가 마침내 집을 나가자, 그는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결국 오빠 손에 자라게 되었는데, 굶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큰 무렵부터는 오빠가 성추행까지 했다고 하니, 그 고통의 깊이가 얼마나 한없을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나라면 스물 여덟 해를 견디어 냈을까? 네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매기에게 해준 이 말은 결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필리핀의 퀘존 시티에서, 버림받거나 학대당한 어린이들과 강간이나 가정 폭력에 희생당한 여성들을 위한 쉼터요 재활교육기관인 "GPS-BK(Green & Purple Sanctuary-Bahay K)"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한다. 여기서 '그린'은 어머니 대지를 의미하고, '퍼플'은 여성을 가리킨다. 'K'란 필리핀 말(타갈로그)로 '보살핌'(kalinga)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가 몸담고 있는 "GPS-BK"는 억눌리고 파괴당한 모든 존재의 생명을 보듬고 돌본다는 거룩한 뜻을 가진 곳, 즉 성역(sanctuary)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성역의 지킴이 매기야말로 성녀가 아닌가?
그가 '떴다'하면 신기한 구경거리를 만난 듯 아이들이 줄줄이 따라 다니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그는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아이들과 가장 자연스런(!)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했다. 그런 그에게 "너야말로 예수다. 가는 곳마다 제자들을 달고 다니니..."라고 했더니 그는 예의 그 수줍은 얼굴로 곱게 눈을 흘겼다.
요즘은 '엽기적'이라는 말이 대단히 '창의적인, 튀는, 상식을 뒤엎는, 진취적인' 등등의 뜻으로 바뀌어 통한다. '엽기'는 그야말로 시대의 유행이 되어 상품에도, 영화에도, 일상언어에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전지현과 차태현이 나와 '대박'을 터트린 영화 제목도 "엽기적인 그녀"였다. 영화 속에서 '그녀'(전지현)는 여성스런 외모와 달리 터프함이 극에 달하는 '엽기'를 보여주었다.
나는 매기에게서 또다른 '엽기'를 본다. 엄청난 장애를 지녔지만 그 어떤 정상인보다도 더욱 건강한 정신과 맑은 영혼을 지닌 강인함이 그의 '엽기'다. 환경과 운명에 발이 묶여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범인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만드는 그의 뒤뚱거림이 그의 '엽기'다.
그렇다면 그의 '엽기'란 우리 시대의 유행에 내포된 경박한 이미지보다는 감동적인 삶을 이끌어 가는 진정한 거인(巨人)에게서 볼 수 있는 경이로움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그는, 개인의 한(恨)은 적극적으로 외화(外化)되지 않는 한, 그래서 유사한 아픔을 지닌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보살피고 다시 살리는 일로 승화되지 않는 한 결코 치유되지도, 극복되지도 않는다는 진리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런 그에 비해 조금도 옆을 돌아볼 줄 모르고 그저 이기적으로 움켜쥘 줄만 아는 이른바 '정상인'들은 얼마나 한심한 장애인들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매기는 언청이부터 시각장애자, 정신지체아까지 모든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손을 내밀고 있을 것이다. 나보다 훨씬 긴 팔과 훨씬 빠른 걸음으로 필리핀 거리를 휘젓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날이 부활신앙으로 사는 삶의 진정한 용기와 힘을 '엽기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엽기적인 그녀, 파이팅!
* 구미정 (기독교윤리학 박사, 편집위원, 협성대, 목원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