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 함께 밥을 먹고 싶어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한 밥상에 둘러앉아서
사는 게 별거야
혁명이 별난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늘 땅에 떳떳이
따뜻한 저녁밥을 함께 먹는 거지
나 생을 바쳐 얼마나 열망해왔어
온 지상의 식구들이 아무나 차별 없이
한 밥상에 둘러앉은 평화로운 세상을
아 함께 밥 먹고 싶어!
- 박노해, "한 밥상에", 『사람만이 희망이다』 중에서
어둠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빛을 볼 수 있다. 터널이 깊고 어두울수록 터널 밖의 세상은 한층 밝은 법이다. 마찬가지로 굶어본 사람만이 배부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혼자 먹는 밥의 설움을 아는 사람만이 여럿이 먹는 밥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
시인 김지하는 '밥은 하늘'이라고 노래했다. 하늘을 혼자서 독점할 수 없듯이 밥도 나누어 먹어야 한단다. 밥을 함께 나눌 상대가 없는 사람은 참으로 고독하다. 어쩌면 가장 불쌍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닌가 싶다. 누가복음 12장 16-20절에 등장하는 부자 마냥 욕심이 많아서 저 혼자 배터지게 먹고 죽을 요량으로 꾸역꾸역 먹어대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인간이면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오붓하게 마주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먹는 밥이 참 '살진' 밥이라는 것을 안다.
무릇 살려면 밥이 필요하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밥을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몸 속에 항상 밥 먹을 공간을 비워두는 사람, 자신의 소화능력에 맞추어 섭식을 하는 사람은 건강하다. 자고로 창자가 가난해야 오래 산다는 말이다. 성서는 '제 배만 섬기는 족속'을 경계할 뿐더러 경멸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단순히, 뱃속에 더 이상 들어갈 틈도 없는데 계속해서 꾹꾹 눌러 담는 미련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제 창자가 가난해야 남의 배곯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자기 배를 채우는 데만 혈안이 된 사람들은 그 탐욕에 오감(五感)이 흐려져서 공동체 전체의 건강 따위야 아랑곳 않는 암적 세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다음 끼니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직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중병에 걸려서 목에 구멍을 뚫거나 코로 튜브를 집어넣고서 영양액을 공급해야 겨우 목숨을 유지하는 사람은 이미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자식 입에 넣어줄 밥이 더 이상 없다는 걸 인식하는 것만큼 뼈저린 고통도 없다. 사르밧 과부처럼, 광야의 하갈처럼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어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한 줌의 쌀에도 몸을 팔아야 하는 여성들이 있는 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절망뿐이다.
인간은 밥을 먹어야 산다. 인간의 생명이 천지조화로 빚어진 신묘막측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生命)이란 땅에서 생겨난(生) 사람이 자기 명(命; 목숨, 운)을 하늘에 걸었다는 뜻이다. 한자로 사람을 뜻하는 '자'(子; 흔히 아들 '자'라고 읽지만, 여자 이름 뒤에도 이 글자가 많이 붙어 있는 것은 아들만이 아닌 사람 일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는 땅에서 움 솟은 생명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힘차게 벌리고 서 있는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라고 한다. 이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본디 음양(陰陽)의 기운을 입은 신령한 생명임을 말한다. 성서도 인간이 흙에서 생겨나 하느님의 숨결(生氣)을 받고 비로소 생명을 얻었다고 증언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천지의 기운을 하나 가득 담고 있는 밥을 먹어야 산다. 옛날에 나무 때서 밥을 하던 시절에는 밥 한 그릇에도 우주의 오행이 다 들어갔었다. 땅(土)에서 자란 곡식으로 나무(木)를 때서 불(火) 위에 솥(金)을 걸고 물(水)을 부어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밥은 자연 그 자체이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음식에 잘 어울리는 가장 평(平)한 음식이다.
혁명이란 큰 데 있지 않다. 이렇게 좋은 밥을 여럿이 골고루 나누어 먹으므로 세상을 평(平)하게 만드는 것이다. 온 지상의 식구들이 저마다 하루의 수고를 끝낸 후 한 밥상에 둘러앉아, 서로의 입 속으로 따뜻한 밥이 들어가는 모양새를 '맛나게' 지켜보며 그 날의 고단함을 녹여내는 것이 혁명이다. 그들이 먹는 것은 더 이상 밥이 아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요, 내일의 희망이다. 밥은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해줄뿐더러 미래를 가져다준다. 예수의 혁명은 그런 것이었다. 높은 자도, 낮은 자도 없이, 정결한 자도, 부정한 자도 없이, 바리새인과 창녀와 세리가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 더불어 생명을 나누고 미래를 여는 것, 그것이 예수가 가져온 혁명이었다.
올해는 밥 못 먹는 사람들이 없으면 좋겠다. '결식아동'이라는 말이 옛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밥으로 오셨다. 성찬의식은 우리에게 예수처럼 세상에 나가서 이웃의 밥이 되라고 도전한다. 밥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부활신앙을 사는 사람이다. 저도 살고 남도 살리는 살림꾼들이다. 이런 살림꾼들이야말로 정녕 새해의 주인 아닌가?
* 구미정 (기독교윤리학 박사, 편집위원, 협성대, 목원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