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요즘 '뜨는' 개그 중에 '연변개그'라는 것이 있다. '수다맨'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개그맨이 질펀한 연변사투리를 늘어놓으며 허풍을 떤다. 그런데 "우리 옌볜에서는∼"으로 시작되는 그의 허풍이 '순 뻥'인 줄 알면서도 밉기는커녕 도리어 귀여운 애교쯤으로 넘기게 된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연변'에서는, 상식적으로 믿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분명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데 어찌 반박할 것인가? (이 개그를 보면서 연변에 사는 분들이 불쾌해하지 말아야 할텐데, 하고 공연히 염려한 적이 있다. 여기서 '연변'은 하나의 환타지세계에 가깝다. 이런 식으로라도 연변이 우리 곁에 바짝 다가오는 일은 얼마나 고마운가?) 어설프지만 나도 연변개그 하나를 해볼란다. 부디 흉보지 마시라.
우리 옌볜에서는 마누라 쥑인 놈은 영웅대접을 받쓈다. 고저 마누라가 남편을 때렸다 기래야 사람들이 '말세네'하문서 들고 일어남다. '맞사모'(맞고 사는 남편들의 모임)를 결성하고 막 난리를 부림다.
마누라 목숨은 파리목숨이나 매한가지로 쳐줌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슘다. 옌볜 사람이 홍콩엘 갔드람다. 본래 삼류 사기꾼에 허랑방탕한 기질이 있었던 놈이람다. 홍콩서 장기체류하문서 모 해묵을 그 읎나 궁리하다가 술집 여종업원을 꼬셨담다. 순전히 영주권 때문인 거 같쓈다.
그 여자 우습게 보면 클남다. 비록 남의 나라서 남들이 천히 여기는 직업이지만서두, 무지 착한 여자였슘다. 돈 벌어 동생들 학교 보내고 부모님 호강시켜드린 효녀 심청였슘다. 그러든 어느날이었슘다.
정확히 1987년 1월 3일이었다고 함다. 둘은 돈 때문에 부부싸움을 했슘다. 기리다가 홧김에 남편이 자기 아내를 죽인 거였슘다. 이 남자, 그 경황에도 얼른 잔머리를 굴렸슘다. 나가서 오리발을 하나 사갖고 왔슘다. 성능 좋은 '북한산'였슘다. 그는 오리발 작전으로 밀어부치기 시작했슘다. 마누라가 본디 북한공작원인데 나까정 간첩만들라고 꼬드기다가 안되니깐두루 납치하려고 했다, 이렇게 각본을 썼슘다.
그랬더니 당시 안기부가 홀딱 넘어간 검다. 아니 오리발인줄 알면서도 기냥 눈감아줬슘다. 중졸 학력에 전과범이었던 사람이 아내를 끔찍하게 살해하고도 버젓이 벤처기업을 차렸슘다. 무슨 돈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슘다. 대통령까지 이 사람 만나서 악수해줬슘다. 우리같이 법 읎이 사는 사람두 안 만나주는 높으신 양반이 기런 놈은 잘도 만나줌다. 주변에 정·관계 인사들이 병풍처럼 죽 둘러서 있었슘다. 혼자 횡령한 돈도 20억원이나 된다고 함다. 뇌물액수는 또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슘다. 자그만치 15년 임다. 살인범이 하루아침에 전도양양한 벤처사업가가 돼서 재기에 성공한 배경을 모르겠슘다.
단순 살인사건이 어쩌다 시국공안사건으로 둔갑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슘다. 본인이 살인을 자백했는데도 왜 안기부가 덮어줬는지,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이런 사기극이 어떻게 15년이나 계속됐는지, 죽은 여자 집안은 쑥대밭이 됐는데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슘다...
차라리 한 토막 개그였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연변'이 엄연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라는데 서글픔이 있다. '수지 김' 말이다. 남편 윤태식에 의해 살해당한 것도 억울한데 간첩 누명까지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의 가족은 그야말로 산산조각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한 남자의 간교한 농간이 낳은 결과다.
수지 김의 어머니는 실어증으로 고생하다 시름시름 죽어갔고, 정신이상이 된 큰언니는 변사체로 발견됐다. 동생은 시집에서 쫓겨나고, 수지 김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던 오빠는 결국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했다. 이렇게 한 여자의 삶이, 그리고 그 여자의 가족 전체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동안에도 그 남자 윤태식은 권력의 비호 아래 15년이나 '잘 나가는' 기업경영인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던가? 아니다. 그것은 죽인 자가 써먹는 구실일 뿐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죽은 자의 '말할 권리'를 존중해왔다. 원한을 품고 죽은 영혼은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는 민간신앙이 억울하게 죽은 자를 위로하는 역할을 해왔다.
15년 동안 편히 눈을 감지 못했을 수지 김의 영혼을 생각하니, 문득 사무엘하 13장 1-22절에 나오는 다말이 떠오른다. 다윗의 딸이었던 다말은 이복오빠인 암논에게 강간을 당하고도, 아버지의 묵인과 친오빠 압살롬의 정권 야욕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한 여자의 일생이 근친상간으로 짓밟혔는데도 사건은 축소/조작/은폐 당한다. 다말은 가부장적 권력이 어떻게 여자를 무자비하게 억압, 이용하여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전형이다.
다말 이야기를 통해 성서는 더 이상 그런 야만이 있어선 안된다고 역설적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여전히 세상은 제2, 제3의 다말로 넘친다. 이번 수지 김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이 땅에서 '말도 안되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그런 일들일랑 사라졌으면 좋겠다. 죽은 자도 언젠가는 반드시 말하는 법이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매들의 입으로.
* 구미정 (기독교윤리학 박사, 편집위원, 협성대, 목원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