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아마 고등학생 시절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국어시간인지 윤리시간인지 아무튼 일년에 한 두 차례는 꼭 “자랑스런 국군아저씨께”로 시작되는 고리타분한 위문편지를 반강제적으로 쓰곤 했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그가 단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고마운’ 군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해서 글을 써야 하다니, 이렇게 곤혹스럽고 야만적인 일도 없다고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어김없이 답장을 받아내는 ‘실력’을 발휘했던 나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빠나 남동생이 없는 나로서는 ‘입영열차’를 둘러싼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를 공유하기가 어렵다. 십 수년 전에 또래 남자친구라도 군대를 보내봤어야 “고무신 거꾸로 신지마!” 어쩌구 하는 신파극이라도 연출됐을 텐데, 이 역시도 내겐 허락되지 않은 경험이다. 그러니 텔레비전에서 ‘우정의 무대’같은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여간 낯설고 불편하지가 않다. 한창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들의 영혼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구실 아래 획일적인 군복 속에 붙잡아 둔 채, “싸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는 주문을 외우게 하는 모양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대한의 아들’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가야하는 게 군대라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으랴? 아들의 멀쩡한 무릎 연골을 부러뜨려서라도 피할 길을 내주고 싶은 부모의 욕심에는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누구나’의 공식에는 항상 예외가 있으며, 그것이 우리 사회를 항구적인 서열사회로 만든다는 데서 상대적 박탈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위 공직자의 병역 면제율은 17.4퍼센트이고, 족벌언론 사주 일가의 병역 면제율은 무려 42.1퍼센트에 달한다고 한다. 아버지가 조선일보 사장이나 높으신 국회의원, 또는 한나라당 총재쯤 되지 않는 한, 보통의 아들들은 전부 ‘얄짤없이’ 군대에 가야한다는 말이다. 참으로 억울한 노릇이다. 그래서 가수 유승준에게 괘씸죄가 더해진 것 같다. 평소에 입버릇처럼 “영원히 한국에서 살 것이며, 신체검사에 당당히 응해서 판정대로 군복무를 치르겠다”고 말하던 ‘바른생활 사나이’가 스스로의 약속을 깨고 미국 시민권을 택함으로써 보통사람들의 공동운명으로부터 슬며시 탈퇴한 것이 야속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열매가 바로 눈앞에 있으면 따먹는 게 인지상정인데, 어찌 그의 개인적 선택을 두고 돌을 던질 것인가? 그에 대한 실망은 타당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의 입국까지 제한한 것은 지나친 보복적 처사요 월권적 법적용이라고 생각된다. 어쩌면 이 참에 반공교육과 국민윤리에서 너도 나도 올에이(all A)를 받아온 우리의 의식부터 점검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름이 오태양이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맨처음으로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을 공개적으로 하였다. 유승준이 부모의 배후 간섭과 본인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군대를 ‘기피’한 것이 되었다면, 오태양씨는 군대를 ‘거부’한 대신 적극적으로 ‘대체복무’를 자원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는 불교의 ‘불살생’(不殺生)의 가르침에 따라 총 대신 평화를 택하기로 발심(發心)하고서, 입영 당일에 논산행 열차에 오르는 대신, 국가인권위원회로 향했다. ‘군필 남성’이어야만 사람대접을 해주는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합의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1,594명에 이르는 양심적 병역거부 수감자들의 결단에 힘을 보태주기 위하여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현재 오태양씨는 두 차례에 걸친 공판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되어 불구속의 자유를 획득한 상태로, 빈곤층 노인 지원기관인 ‘자비의 집’과 ‘희망학교’에서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유승준과 오태양 - 결코 똑같은 잣대로 잴 수 없는 두 청년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종교를 가지고 따지는 것은 시시한 가십 수준이다. 누구는 28개월 에누리없이 채웠는데 누구는 이래서 빠지고 저래서 봐주냐는 식으로 풀 일도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차분히 멈추어 서서,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한번도 제기된 적이 없는 근본적인 문제, 곧 ‘군대’라는 특수 제도에 대한 거의 우상숭배적인 태도를 재고해 볼일이다. 오태양씨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들려주었던 다음과 같은 ‘발칙한’ 꿈이 이 땅에 평화의 씨앗을 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저에게는 진정 꿈이 하나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전쟁과 가난의 고통이 사라지는/ 꿈 말입니다/ 그리고 걸어갈 것입니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총 든 군인이 아닌 자원봉사자로 만나/ 인류의 꿈과 희망에 대해/ 지구의 생명과 평화에 대해/ 웃고 이야기하며/ 함께 어깨동무할 수 있는/ 그 날을/ 염원하며 말입니다.?
* 구미정 (기독교윤리학 박사, 햇순 편집위원, 여신협 정의평화위원장, 협성대, 목원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