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어린 시절, 어머니의 가르침 중에는 "나쁜 짓 하면 지옥 간다!"는 레파토리가 꼭 들어 있었고, 그 때의 지옥은 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러면 나는 상상만 해도 무서운 지옥 풍경에 몸을 떨면서, 순전히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착한 아이로 살아야겠다는 결단 비슷한 걸 하곤 했었다. 얼마 전에 본 영화 "디 아더스(The Others)"에서도 주인공 니콜 키드먼이 자기 애들을 앉혀 놓고 그 고리타분한 지옥 얘기를 실감나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지옥=불바다'라는 공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나 보다. 그만큼 불은 무섭다. 불에 타죽는 경험은 그 자체가 지옥과도 같은 고통이리라.
인천 호프집, 화성 시랜드, 경기도 입시학원, 군산 대명동... 아직도 우리 기억 속에 생생한 화재현장들이다. 불은 언제 어디서든 날 수 있다지만, 호주 시드니의 대형 산불처럼 40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대끼다 불이 나는 천재(天災)를 피할 수야 없다지만, 그래도 예방과 안전에 충분히 신경 쓰면 화재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을뿐더러 혹 피하지 못하더라도 피해규모를 줄일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예고된 인재(人災)'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우리는 똑같은 참변을 매번 똑같은 공식으로 겪는다. 무슨 놈의 나라가 불이 나도 꼼짝없이 타죽어야 하는지, 어째서 공공시설에 소방용품 하나 제대로 갖추어놓지 못하는지, 출입문은 어쩌자고 안에서 못 열게끔 만들어 놨는지, 창문에 쇠창살을 쳐놓고 감금상태로 일을 시키는 건 도대체 무슨 노예적 발상인지, 그나저나 이 첨단기술의 시대에 건축자재며 실내 인테리어 자재를 좀 업그레이드시킬 묘안은 없는 건지, 도대체 소방시설 및 업소구조 점검에 책임이 있는 감독관청과 관할 경찰서는 뭘 하기에(얼마를 먹었기에?) 그런 엉터리 건물에 영업허가를 내주는지, 소방차가 접근할 수 없게 아예 소방도로가 없는 달동네 사람들은 또 어찌해야 하는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답답함이 채 식기도 전에 우리의 고질적인 안전불감증이 또 하나의 어처구니없는 참변을 불렀다. 지난 1월 29일에 발생한 군산 개복동 유흥주점 화재사건이다. 그 현장으로부터 바로 1㎞쯤 떨어진 곳에서 16개월 전(2000년 9월 19일)에도 똑같은 사건이 있었건만,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희생자만 나왔을 뿐이다. 고작해야 30평밖에 되지 않는 공간에서 옹기종기 모여 자던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1층에서 번지기 시작한 불길을 피해 2층으로 올라가려던 그들은 두꺼운 철문을 열 수가 없었다. 역시 출입문이 안에서 열 수 없게끔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취업각서와 현금보관각서에 발이 묶여서 한 달에 두 번, 그것도 단체로 목욕탕에 가는 것 말고는 일체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던 그들은 그렇게 감금된 채로 죽어갔다. 현대판 노비문서에 꽃다운 젊음이 저당 잡혀서 강제로 술을 팔고 성(性)을 팔아야했던 그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불구덩이에 빠짐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생지옥같은 생활을 청산하게 된 것이다.
내가 사는 수원역 근처에도 큰 길 몇 개를 사이에 두고 밤만 되면 활기를 띠는 홍등가(紅燈街)가 있다. 아니, 우리 나라 웬만한 역(驛)치고 술집과 러브호텔을 끼지 않은 '순진무구한' 역이 또 어디 있으랴? 그것은 이 장사가 뜨내기손님들을 겨냥한 업종이라는 뜻이고, 또 그런 만큼 인간관계의 노골적인 천박함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영역이라는 뜻이다. 붉고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나이를 알 수 없게 최대한 진한 화장과 야한 옷차림으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그들은 하룻밤 정욕을 주체하지 못한 의지박약 남성들에게 '팔려야 하는 상품'일 뿐이다. 더러는 늙고 병든 아버지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또 더러는 동생들 학비를 대기 위해, 아니면 자식이 굶는 걸 차마 보지 못하는 절박한 처지에서 거기까지 와 있거나, 혹은 인신매매로 잡혀와서 그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며, 누군가의 딸이요 누이요 어머니인 것이다.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빚더미에 묶여 팔려 다니지 않았다면, 뭔가 다른 선택이 있었다면, 절대로 그런 손바닥만한 쪽방에서 허울 좋은 화대(花代) 몇 푼에 온갖 모욕과 수치를 참는 일쯤은 안 할 것이다. 그런데도 얄팍한 자본주의 문화와 오랜 가부장제 역사는 그들을 '공공의 적'으로 매도하면서 남성에게 면죄부를 주어왔다. 매음행위를 '밖에서 도닦는다(外道)'거나 '봄을 산다(買春)'는 표현으로 왜곡하면서 그 본질에 깔려 있는 남성의 그릇된 성도덕과 사회의 이중규범을 교묘하게 은폐, 위장하는 것이다. 어거스틴도 "시궁창과 마찬가지로 매춘부들은 우리의 현숙한 아내와 딸들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악"이라고 했다던가?
'사는 자가 없으면 파는 자도 없다'는 간단한 경제원리가 거꾸로 적용되는 현장이 바로 이 바닥이라는 사실에서 가부장제의 야만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병원비와 밀린 빚 갚기도 버거운 판에 꼬박꼬박 시골집에 생활비를 부치던 여심(女心)이 있는가 하면, 그들의 생떼같은 돈을 야금야금 갈취하여 2억원짜리 BMW와 에쿠스를 굴리며, 1천만원짜리 샹들리에와 2천만원짜리 창문이 번쩍이는 호화주택에서 부당 이득을 누리던 남심(男心)도 있다. 어찌 보면 지옥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이부조리한 현실이 바로 지옥이다.
그 날, 그 불구덩이 속에서 서럽게 스러져간 우리 자매들이 부디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 보수적인 언론과 정치권의 무관심 때문에 그들의 죽음이 잊혀져선 안 된다. 이 참에 아예 우리 나라의 기형적인 접대문화와 비대해진 성 향락산업, 그리고 절름발이 윤리의식에 대한 뼈저린 회개가 있어야겠다. 우리의 자매들이 사회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기본적인 인권마저 짓밟히며 생지옥을 살고 있는 한, 아무도 가해자라는 꼬리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한겨레신문(2002.2.2자 독자만평)
정종해 그림(jungjonghae@hanmail.net)
* 구미정 (기독교윤리학 박사, 햇순 편집위원, 여신협 정의평화위원장, 협성대, 목원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