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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正東津)은 '모래시계'라는 드라마 때문에 일약 유명해진 간이기차역이다. 손에 잡힐 듯 넘실대는 동해바다를 배경으로 비스듬이 서있는 노송 곁에서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수에 젖어있던 고현정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추억의 명소가 바로 정동진이다. 그런데 그 정동진이란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한 여름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구수한 옛날 이야기를 듣던 기분으로 잠시 '전설의 고향' 속으로 떠나보자.
옛날 조선시대 어느 왕이 하루는 심한 안질에 걸렸다고 한다. 온갖 약을 다 써보고 아무리 용한 의원들에게 보여도 눈병이 낫지를 않자 마침내 점쟁이를 불러다가 점을 치게 되었다. 헌데 점괘가 나오기를, 왕궁에서 정동쪽에 큰절이 하나 있는데 그 절에서 너무 많은 쌀뜨물을 바다로 흘려보내 동해 용왕이 눈병을 앓게 된지라, 이 실상을 알리기 위해 왕도 역시 같은 병을 앓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왕이 정동진의 큰절을 찾아보았더니, 과연 궤방산 기슭에 등명사(燈明寺)라는 절이 있는데, 수백명이 넘는 중들이 밥을 해먹는 통에 엄청난 양의 쌀뜨물이 매일 바다로 흘러들고 있더란다. 이를 괘씸히 여긴 왕은 곧장 명을 내려 등명사 문을 닫게 했는데, 그러자 왕의 안질도 저절로 나았다는 얘기다.(지금도 그곳에 같은 이름의 절이 있지만 이 절은 전설 속의 등명사와는 달리 후대에 새로 세워졌다고 한다).
본격적인 휴가철이다. 올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피서지로 동해를 꼽았다. 비슷한 시기에 너도나도 한곳에 몰려가 봤댔자 넘치는 인파에 몰상식한 바가지 요금 때문에 괜스레 피곤과 짜증만 더할 것이 뻔한 데도 문명에 지친 현대인들은 어떻게든 갑갑한 도시를 탈출하고 싶어한다. 실로 안쓰러운 악순환이 아닐 수 없다. 해마다 여름이면 휴가비를 벌기 위해 나쁜 짓도 서슴지 않는 일부 젊은이들의 탈선행위도 안쓰럽고, 휴가철만 지나면 산부인과의 매상(?)이 올라가는 현실도 안쓰럽고, 여름 한철동안 양심을 속여야 나머지 열달을 겨우 살아간다는 현지주민들도 안쓰럽고,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는 피서객들도 안쓰럽다. 집에서 조용히 쉬고 싶지만 아이들 성화에 길을 나설 수밖에 없는 아빠들도 안쓰럽고, 장소만 바뀌었을 뿐 휴가지에서도 가사노동을 반복하느라 진정한 휴가를 즐기지 못하는 엄마들도 안쓰럽다. 그러나 더욱 안쓰러운 것은 전국의 해수욕장과 야영지마다 우르르 몰려가 먹고 마시고 노는 사람들 덕에 톡톡히 몸살을 앓는 이 땅의 산과 바다다. 자연은 세파에 찌든 우리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서 삶의 위로와 재충전의 에너지를 선물하지만, 우리는 배은망덕하게도 자연에 쓰레기만 떠안긴 채 돌아온다. 생명의 요람인 바다와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상징되는 산이 우리의 뒤틀린 휴가문화 때문에 아파서 신음하고 있다.
등명사 이야기는 한마디로 물의 오염을 다룬 전설이다. 쌀뜨물 때문에 용왕이 안질에 걸린 것은 사실이나, 그것 자체가 바다오염의 주범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쌀뜨물의 양이 너무 많았다는 것, 다시 말해 등명사의 규모가 지나치게 컸다는데 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쓰고 버리는 오물도 덩달아 많아지는 법이다. 그 오염의 정도가 자연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해지면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고 병들게 마련이다. 등명사 전설은 그러한 자연의 이치를 우리에게 알려줌과 동시에, 자연의 질고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포기하고 절제함으로써 자연과 조화를 맞추는 새로운 사귐에로 나아가야 한다고 일깨워준다.
1980년대 급속한 경제발전과 더불어 '무조건 떠나고 보자'는 식으로 천박하게 시작된 우리의 휴가문화가 이제 성숙의 단계로 접어들 시점이 되었다. 무조건 떠나기보다는 무엇을 위해 떠날 것인가, 떠난 길에서 무엇을 얻어 되돌아올 것인가를 점검해야 한다. 여름휴가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봄이나 가을휴가를 계획해보는 것도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생태계를 위해 무척 좋은 방법이다. 올해부터 아이들의 방학이 융통성있게 조정된 것도 그러한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기업들은 앞으로 새로운 휴가문화가 정착되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속도와 경쟁이 지배하는 우리네 삶의 수레바퀴에서 잠시 벗어나 시계와 핸드폰 따윌랑 일찌감치 꺼두고 한동안 '느림'과 친해지는 것, 그럼으로써 머리로만 살던 습관에서 벗어나 몸과 일치하게 되는 것, 소원했던 가족간에 진솔한 대화들이 꽃피고, 잊었던 '참 나'가 회복되고, 자연의 품에 안겨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에 흠뻑 취했다 오는 것, 그것이 진정한 휴가이다.
* 이 글은 <교회연합신문>(8월5일자) "여성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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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07 10:15: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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