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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텔레비전에 불어닥친 사극 바람의 선두에 '여인천하'가 있다. '삼종지도'가 지엄하던 조선시대에 자신들의 지략과 술수를 총동원하여 권력에 대한 야망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문정왕후와 정난정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메이야?"하고 끝을 올리는 경빈의 독특한 말투는 최신 유행어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풍전등화와도 같은 국운에 맞서 뛰어난 지혜와 모략과 통찰력으로 정치에 영향을 끼치다가 마침내 일본 모리배에게 시해당하는 '명성황후'의 이야기도 한창 줏가를 올리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성을 전면 타이틀로 내세운 이 두 드라마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현상에 발맞추어 또하나 흥미로운 변화가 있다. 한 미디어조사에 의하면 시청자들, 특히 주로 젊은 여성층이 더 이상 '황수정표' 이미지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드라마 '허준'에서 숭고한 희생과 인고의 정신으로 무장한 예진이로서 성공한 그녀가 현대극에서조차 똑같은 역할로 등장하는 것이 식상하다는 비판이다. 이는 바야흐로 황수정이라는 기호가 다만 현모양처형 여성을 찾아 헤매는 남성들의 시대착오적 욕망의 대리만족일 뿐임을 보여준다.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텔레비전 드라마에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다. 과거의 궁중 드라마들은 주로 왕을 사이에 두고 아웅다웅하는 여인네들의 치졸한 '애정쟁탈전'에 초점이 있었다. 그래서 볼 때마다 '밥 먹고 할 짓도 되게 없네'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궁중 여인네들의 감정적 대립은 시청률을 의식한 양념쯤으로 처리되고, 대신에 왕권마저도 좌지우지하는 그들의 권력쟁투가 메인 메뉴로 펼쳐지는 느낌이다. 현재까지의 방영분을 보면, 문정왕후와 명성황후는 각각 자신의 권력기반이 될 아들을 낳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남성 권력자들에 의해 내침을 당하지 않고 권력의 중심에 살아남을 것인가를 화두로 두뇌싸움을 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을 듣는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인 것 같다. 문정왕후에게는 경빈이, 명성황후에게는 영보당 이씨가 대적으로 등장한다. 성서만 보더라도 사라와 하갈이, 레아와 라헬이, 한나와 브닌나가 서로 대립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깊이 따져보면, 이들 각각의 대립쌍 사이에는 항상 남자가 끼어있고 그것이 문제의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아니 남성 일반을 말하는게 아니다. 여자들 틈바구니에 끼인 남성 역시 그다지 행복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이 맥락에서 남녀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원인은 축첩제를 용인하는 사회적 풍토이며, 더 나아가 남성에게만 권력을 집중시키고 남성만이 인간의 표준이라고 설득하는, 따라서 여성의 존재이유란 오직 아들을 낳음으로써 부계혈통을 이어주는 것밖에 없다는 남성숭배주의인 것이다.
구약성서를 펼치면 우리는 또 한편의 '여인천하'와 만난다.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였던 와스디 이야기이다. 그녀는 외모가 아리따울 뿐만 아니라, 성품 또한 주체적이었던 것 같다. 왕이 신복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그녀 역시 부녀들을 위하여 따로 궁중연회를 베풀었다(에스더 1:9)는 것은 그만큼 왕비로서 정치적으로 자기 세력을 키우고 관리할 줄 안다는 뜻이고, 왕이 그녀를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면류관까지 정제하고 오라고 불렀을 때에 거절한 것(1:11-12)은 여성으로서 한낱 잔치자리의 노리개감이나 눈요기감이 되기 싫다는 분명한 자의식을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모습이 종래의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왕비상에 익숙한, 그래서 와스디같이 '대가 센' 왕비는 자신들의 정치적 야심에 언제 장애물이 될지 모르니 제거해야한다고 믿는 궁중의 남성세력가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들은 "왕후의 소문이 모든 부녀에게 전파되면 저희도 그 남편을 멸시할 것"(1:17)이라는 음해공작을 펴서 마침내 와스디 왕후를 폐위시키기에 이른다.
남성들의 권력쟁탈전에서 희생양이 된 불운의 왕후 와스디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남성지배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성이 요구하는 대로만 하라고? 여성의 인격적 존엄성이니 주체성이니 떠들다가는 짓밟히기 십상이라고? 권력은 남성이 독점하는 것이지 남녀가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고? 아니다. 잊혀진 왕후 와스디는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여자를 비인간화시키는 어떠한 사상이나 권력이나 제도에도 절대 굴복하면 안된다고 소리친다. 오늘날 성 평등과 정의를 위해 일하는 수많은 여성들은 여성이 득세하여 남성을 짓누르는 식의 '여인천하'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남성과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존엄한 형상을 구현하면서 살아가도록 인간적인 세상이 열리기를 염원할 뿐이다.
* 이글은 <교회연합신문>(8월) "여성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모두들 '여인천하' 재밌게 보고 계시죠? 함께 '다시 보기' 위하여 여기 옮겨 싣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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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2 16:45: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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