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아, 잔인한 5월이다.
시인 엘리엇(T.S. Eliot)은 「황무지」라는 시에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건만, 이 땅의 여 자들에게는 5월이야말로 잔인한 달이 아닐 수 없다. 거창하게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나신 날'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거시적이고 정치적이고 역사적 이고 종교적인 날들에 눈길을 줄만큼 5월의 여자들은 한가롭지 않다. 왜냐하면 5월 달력에는 어린 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공포스럽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일년을 벼르고 벼른 아이들의 기대와 성화에 지갑을 여는 엄마들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시집과 친정 부모님 두루 섭섭지 않게 하느라 가계부에선 찬바람이 인다. 거기에 덧붙여 스승의 날은 또 어떻고? 하자니 부담이요, 안 하자니 눈치보이는 인사치레로 인해 엄마들은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심정이 된다.
그래서 '가정의 달'이라는 그럴듯한 장밋빛 포장지에 싸인 5월은 사실상 잿빛이다. 이 귀퉁이 저 모서리 맞춰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는 주부들에게는 5월의 통과의례들이 겁나는 숙제로 다가 오는 것이다.
공과 사의 구분이 분명한 대부분의 사회를 보면, 공적인 일은 항상 남성('바깥양반') 차지이고, 사적 영역은 늘 여성('안사람', '아내') 몫으로 떠넘겨진다. 이러한 이분법에서 어머니는 좋게 말해 가정의 구심점으로 미화되고, 나쁘게 말해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힌 죄수가 되어 평생을 무 보수 노동에 시달린다. 혹시 직장에 다니는 주부라고 해서 가사노동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일 부 '깨인' 남편들은 살림과 자녀 양육을 공평하게 분담하기도 한다지만, 대다수에게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렇기에 맞벌이 주부는 직장과 가정을 양립해야 한다는 중압감에다가, 어느 한쪽에도 전 념하지 못한다는 죄의식마저 겹쳐 '이중고'의 사슬에 매이게 된다.
'가정'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레 파헤쳐 보면, 식구들이 언제든 돌아가 편안히 쉴 수 있는 안식 처로 낭만화된 개념 뒤편에, 얼굴 보기가 무섭게 서로 으르렁대는 추악한 면면을 볼 수 있다. 출 세와 성공과 돈만이 인간을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가 된 우리 시대의 가정에는 죽어라고 아이들을 윽박질러 '속성 재배'하려는 부모와, 죽어라고 어른의 말에 귀를 닫고 '네 멋대로 해라'는 신세대 의 교리에 맹종하는 자녀만이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가정은 온갖 사회범죄의 온상 처럼 되어버린 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낳고 기르고 치유하는 가정의 본래적 기능을 어찌 포기할 수 있으 랴? 세상과 사람에게 치여 상처 입은 영혼이 위로 받고 새 힘을 얻는 거룩한 장소가 바로 가정이 다. 이렇게 이상적인 가정이 세워지려면 가족 개인-대개는 어머니-의 일방적인 희생과 봉사만으 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가정은 또다시 사회악을 연장하며 재생산하는 도구밖에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모든 식구가 생명을 살리는 '살림살이'에 동참하고, 강제성 대신에 자발성을 장려하며, 경쟁과 힘의 논리 대신에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적 원리를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그러한 가정을 "생태가정"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생태계가 돌아가는 질서 그대로, 상호연결과 의존과 돌봄에 기초한 가정이다. 세계를 지으시고 날마다 새롭게 재창조해가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받아, 생기(生 氣)가 충만한 가정이다.
5월에는 생명 살림에 참여하고 협력하는 가정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가정의 의미가 생물학 적 혈연개념을 넘어, 좀더 폭넓고 다양해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가정의 달'에 '가정'이라는 말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참말 좋겠다.
* 구미정님은 기독교윤리학 박사이며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서기와 계명대 강사를 거쳐
현재 호주에서 목회학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