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그것은 벅찬 감동이고 충격이었다. 남과 북의 두 정상이 손을 맞잡고 얼싸안은 장면 - 각 언론마다 생생하게 보도된 이 그림 한 장은 우리의 정치적 무관심과 패배주의를 자극하 기에 충분했다. 새 천년의 화해 기류는 그렇게 상처 깊은 한반도에도 여지없이 불어와, 전쟁 의 달 유월을 평화의 달로 거듭나게 하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남북 정상회담은, 매스컴에 여과 없이 노출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인간적 평가에 서부터 입안에 침이 고이게 만드는 북한 음식에 대한 동경에 이르기까지 풍성한 뒷 얘기들 을 낳았고, 이른바 '북한 특수'를 겨냥한 재계의 발빠른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질적인 존재로, 혹은 굶주린 난민으로, 심지어 적으로 인식되었던 북한 및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일반 적 태도가 확연히 달라져, 최소한 '북한 바로 알기'가 통일의 첫걸음이라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케 된 것은 정상회담의 또 다른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는 통일의 당위성에 연연한 나머지 성급하게 들뜰 것이 아니라, 한 숨 돌리는 여유를 갖고 잠시 층계 에 앉아 다음 계단에 오를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분단과 통일의 의미 를 되짚어보는 시간이 소중한 까닭은 한반도의 운명이 결코 개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 문이다.
돌이켜보면 이 땅의 분단구조는, 뭇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신음하 는 이 세계를 치유하고 새롭게 재창조해 가시는 하나님의 살림살이에 정면으로 위배된 것이 다. 왜냐하면 국제적 갈등과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고착화된 분단구조가 한반도에 깃들 어 사는 모든 생명체를 상호경쟁과 불신과 억압과 죽임에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 단체제로 인해 가장 고통받고 설움 당한 계층이 바로 여성, 특히 가난한 민중 여성들이다. 남한은 남한대로 가부장제와 결탁한 자본주의 체제가 수출산업과 관광산업에서 여성의 몸과 노동력을 마구 이용하고 착취하였다. 혹여 여성들이 정당한 사회참여의 권리와 분배의 권리 를 주장할라치면 언제나 국가 안보라는 거대담론이 나타나 입을 틀어막기 일쑤였다. 북한은 북한대로 사회주의 혁명에 의해 호주제가 폐지되고 직장내 탁아소가 설치되는 등 제도적으 로는 남녀평등의 기틀이 마련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전통적인 가부장제가 그대로 남아 있어, 여성으로 하여금 사회노동과 가사노동을 병행해야하는 이중 부담을 안겨주었다.
이제 남북의 화해 무드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의 뜻을 되새긴다. 그 뜻은 누가복 음 1장 46-55절에 나타난 마리아 찬가 속에 녹아들어 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상 가 장 힘없는 자, 눌린 자, 소외된 자를 들어 구원사의 주체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민족 통일을 이야기하면서 마리아를 새롭게 볼 필요가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마리아는 하나 님의 아들을 낳았다는 그 자체로 인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비밀을 깨닫고 능동적으로 그 뜻을 수용했다는 데 그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노 예, 하늘과 땅을 화목케 하려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일계획이 한 민중 여성의 몸에서 이루어 졌다. 그야말로 겨자씨의 기적이요, 하나님 나라의 총체적 이미지이다.
이념과 체제가 빚은 고통뿐만 아니라 가부장제로 인한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 땅의 여성들은 마리아의 비젼대로 통일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철학자 칸트식 표현을 빌 리자면, 민족해방 없는 여성해방이란 맹목적이며, 여성해방이 배제된 민족해방은 공허하다. 우리 기독여성은 여성 고유의 생명과 살림의 원리로써, 왜곡된 자본주의와 경직된 사회주의 를 넘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에 한층 다가서는 제 3의 민족해방의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 내면의 통일운동부터 시작하자. 여성만의 미덕이라고 말해지는 모성에는 생물학적 모성 외에도 사회적 모성이 있다. 생물학적 모성은 불임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전체를 경험적으로 배제시키지만, 사회적 모성은 전체 인간을 향해 개방된다. 여성들은 스스로 빠지기 쉬운 가족이기주의의 함정이 분단을 낳고 영속화하는 죄의 시초임을 자각하 고, 민족의 어머니로서 그 기도와 실천의 폭을 넓혀야 한다. 반군사문화적이고 평화애호적인 자질을 살려 생명을 돌보고 기르고 보전하는 일에 헌신할 때, 생물학적 모성은 사회적 모성 에로 통합될 것이다. 기독여성들은 생명 살림의 감수성으로, 멀게는 북한 주민들과 연대하는 법을 배우고, 가깝게는 탈북 주민들의 고단한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 하고 있는 분단 신드롬은 이러한 작은 몸짓과 마음가짐에서 비로소 치유될 수 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 희생에 의해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통일이 아니라, 통일의 가면을 쓴 폭력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은 남과 북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양편의 장점 을 최대한 살려 어떻게 하면 좀더 인간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지 함께 모색하는 제3의 대안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새 천년 한반도에 감도는 통일의 기운은 이제까지의 어떤 통일의 역사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할 책임이 있다.
8월 15일, 우리 민족의 해방절이다.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해방은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값진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낭만적으로 혹은 추상적으로 중언부언하던 그간의 통일 기도를 걷고, 새롭고도 구체적인 통일의 영성으로 신앙과 삶을 다져야 할 때이다.
* 구미정 (기독교윤리학,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서기와 계명대 강사 역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