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때로는 살아남는 일 자체가 힘에 부칠 때가 있다.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 배반당했을 때, 나의 전부를 걸고 몰두했던 일이 송두리째 실패로 돌아갔을 때, 엉뚱한 사건이나 사고에 말려들어 재기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때, 사랑하는 부모나 배우자나 자녀를 잃었을 때... 그런 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 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그저 휘둘릴 수밖에 없을 때 우리는 삶의 끈을 놓고 싶어진다. 그 런 처지의 사람들이 흔히들 내뱉는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은 그래서 '살지 못해 죽고 싶다' 는 말의 역설적 강조어법이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게 된다니, 이 얼마나 기막히고 황당한 노릇인가? 천사의 수태 고지를 맨 처음 듣는 순간부터 마리아는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무슨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인류 역사상 가장 억울 한 여성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마리아라고 말하고 싶다. 약혼자가 따로 있는데 딴 남자랑 놀 아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자발적으로 손들고 나서서 하나님께 자궁을 임대해준 것도 아니다. 순진한 시골처녀 마리아는 문자 그대로 '당한' 것이다. 불가해한 하나님의 구 원사에 공연히 엮여 들어가서 코가 꿰인 것이다.
여성신학자들은 세상의 구원자를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메시지 앞에서 마리아가 "예"라고 말한 사실로부터 그의 위대성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장차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서 마리아가 불렀다는 찬송(눅 1:46-55)은 구약성서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와 쌍 벽을 이루는 예언자적 노래라는 것이다. 자기 태 속에 품은 아기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 젖 힐 구원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는 것 이다. 이러한 해석이 마리아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 곧 연약하고 수동적이며 성적으로 철저 히 표백된 동정녀 이미지에 도전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게는 어쩐지 만족스럽지가 않다. 모진 운명의 수레바퀴 밑에서 신음하던 진짜 마리아의 삶과 동떨어진 인상이다.
그는 결코 영화 '에어리언' 시리즈의 시고니 위버같은 강한 여전사가 아니었다. 마리아가 그토록 당차게 하나님 나라에의 확신과 결단이 있었다면, 요셉과의 정혼을 파기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에 서서 여성 지도력을 발휘했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그렇 게 호락호락하지를 못했다. 여자가 '나대는' 꼴을 봐주는 분위기가 아니었을 뿐더러, 소위 ' 찍힌' 여자, 인습과 금기를 넘어선 여자는 생존의 위협마저 느껴야 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살아남기 위해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요셉과의 결혼뿐이었다(덕분에 요셉만 의인 대 접을 받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 후로도 마리아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나 보다. 예수의 첫 이적이 일어났던 가나 의 혼인잔치 자리에 마리아는 요셉 없이 혼자서 등장한다(어쩌면 예수가 장성한 이후 요셉 과 그 일가에게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자녀들과 함께 예수를 찾아갔을 때에는 " 당신은 내 어머니가 아니다"라고 날벼락같은 선고를 받기도 한다(막 3:31-35). 생물학적 모 성을 상대화함으로써 혈연을 초월한 새 가족 윤리를 선포하고자 했던 예수의 깊은 뜻을 헤 아리기에는 당시의 충격이 너무도 컸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예수 곁을 떠 나지 않았다. 그것이 중요하다. 그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며 죽 어갈 때에도 살아남았고, 그 아들의 무덤도 지켰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억울해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고도 살아남았다. 누구도 그의 삶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거기에 부활의 소망이 있다. 마리아는 예수의 부활을 보았다.
그래서 마리아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에 짓눌려 숨막히는 고통 가운데 있는 많은 여성들에 게 위로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정신대 할머니들과 민가협 어머니들은 마리아의 생존 의 영성을 대변하는 실체들이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쉽게 타협하지 말고 질기게 살아 남자. 마리아의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그렇게 쓰여있다. 때로는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다른 이에게 갸륵한 모범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 구미정 (협성대학교 신학연구소 상임연구원, 기독교윤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