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 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 박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
작년 이맘때 나는 호주에서 무지무지하게 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비행기가 적도를 가로지 를 때만 해도 별로 의식되지 않던 계절감각이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통해 절실히 다가왔다. 말 하자면,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몸으로 느끼는 것이 일치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로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깨닫기 위해 꽤 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이다.
그 즈음, 정확히 2000년 1월 1일 0시에, 나는 시드니 외곽 지역, 문자 그대로 다양한 피부색과 문화가 어우러져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대표적인 '멀티컬츄럴'(multicultural) 지역 라켐바 (Lakemba)의 한 아파트에서 멀뚱히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 가을 시드니 올림픽을 통해서도 확인된 바지만, 시드니 사람들은 유난히 화려한 불꽃놀이에 열광하는 것 같았다. 초대형 밀레니엄 불꽃쇼가 펼쳐지는 하버 브릿지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한번에 최소 2천만원짜리를 저렇게 마구 쏘아대다니, 음, 상당히 엽기적이군... 어느새 불꽃놀이 도 절정에 달해서 이제 막 심드렁해질 무렵이었다. 타국에서 그 뜻깊은 시간을 쓸쓸히 맞이하고 있다는 감상에 젖어 공연히 심술을 부리던 나는 문득 밤하늘을 영롱히 수놓아가는 글자들에 시선 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림같은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릿지 위로 어둠을 밝히며 떠오른 글자는 다름 아닌 'Eternity'(영원)!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시드니 레드펀(Redfern, 원주민 주거지역)에서 시작되어 지방 소도시 까지 번져나간 단어, 길바닥마다 조각한 듯 아름다운 필체로 보도 블록을 장식했던 그 단어는 당 시 사람들에게 신비한 마력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전설의 주인공 '미 스터 이터니티'는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포주 어머니 사이에서 학대받으며 자라난 아서 스테이 스였다. 열두살에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후 도둑질로 감옥을 드나들면서 비참하게 살아가던 그는 오십을 바라보던 나이에 우연히 들은 설교로 인해 인생이 뒤바뀌게 된다. "영원... 이 얼마나 놀랍 고 뿌듯한 말입니까? 여러분은 영원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 영원의 시간을 여러분은 어디서 보내 시렵니까?" 교회 문을 나서던 스테이스의 가슴은 온통 '영원'이라는 낱말로 벅차 올랐다. 그는 즉 시 호주머니를 뒤져 낡은 백묵으로 길바닥에 '영원'이라는 단어를 써내려 갔다. 기적은 그때부터였 다. 제 이름조차 제대로 쓸 줄 모르던 그의 손에서 놀랍도록 뛰어난 필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후 로 30여년간 그는 시드니 구석구석에 50만번이나 한결같이 정성스런 글자를 새기면서 '영원'의 전 령사가 되었다.
순간을 살되 영원에 잇대어 사는 사람, 희망은 바로 그런 사람에게서 나온다. 현실은 언제나 벅차고 숨막히는 두려움으로 우리를 에워싸지만, 영원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다. 영 원을 본다는 것은 "사방이 우겨쌈을 당해도"(고후 4:8)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날마다 새롭게 부활하고 회복되고 치유받고 온전해지도록 우리 삶의 기반을 든든히 떠받치고 계신 하나님의 능 력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믿음은 '밑힘'이다. 세상은 약자를 쓰러뜨려서 '아무 것도 아닌 자'(nothing)처럼 물화(物化)시키고, 버젓이 존재하는 사람들을 '비존재'(non-being)의 범주 속에 떠 밀지라도, 하나님의 생기(生氣)가 도처에서 불어온다. 그 거룩한 숨결에 우리가 되살아나서 하나님 의 '살림 사역'에 동참하는 것, 그것이 새해를 여는 우리의 결단이자, 하나님의 바램인 것이다.
시드니 하늘을 수놓던 'Eternity'는,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인 것을, 우리가 바로 그 희망의 사람 이어야 함을 이야기해 준다. 지금 여기서 영원을 사는 희망찬 여성들의 이야기들이, 길 찾는 여성 들의 이야기들이, 참 좋은 여성들의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솟구쳐 오르는 한 해이기를 기원한다.
* 구미정 (협성대학교 신학연구소 상임연구원, 기독교윤리학 박사)
